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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명윤 시인 / 삐뚤삐뚤 아버지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4.

이명윤 시인 / 삐뚤삐뚤 아버지

 

 

삐뚤삐뚤 아버지 오신다 삐뚤삐뚤 목소리로 오신다 선생님이 내어 준 빈칸을 채우지도 못했는데 삐뚤삐뚤 부끄러운 아버지가 삐뚤삐뚤 목을 흔들며 오신다

 

나는 똑바로 쓰는데 글씨가 이상하게 삐뚤어지네, 부조 봉투에 아버지를 반듯하게 쓰던 날 삐뚤삐뚤 웃던 아버지가 치아가 삐뚜름하던 아버지가

 

삐뚤삐뚤 그려놓은 국민학교 담장 눈들을 지나 삐뚤삐뚤 수레를 따라오는 어두운 골목을 지나 삐뚤삐뚤 노랫가락 엇박자로 부딪히는 선술집 창문을 지나 삐뚤삐뚤 지붕마다 피고 지던 해와 달을 지나

 

아직 아버지의 빈칸을 채우지도 못했는데 삐뚤삐뚤 아버지가 오십이 넘은 나를 업고 걸어오신다 삐뚤삐뚤 연필 한 자루로 삐뚤삐뚤 새 공책으로 삐뚤삐뚤 노란 토끼 그려진 책가방으로

액자 속의 아버지는 늘 반듯하여 어머니는 두고두고 자랑이신데 내 몸속 지도엔 삐뚤삐뚤이 너무도 많아 아버지 오시는 날 창문을 열면 멀리서도 아버지 어깨가 무겁게 흔들거린다 가만히 아버지를 눌러쓰면

아버지가 눈치도 없이, 삐뚤삐뚤 글자로 걸어오신다

 

 


 

 

이명윤 시인 / 해변가의 돌들

 

 

누가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그 소문의,

 

꼬리를 물고

그 꼬리를 꼬리가 물고

어떤 날은 바람까지 등에 업은 꼬리가 꼬리를 물고

꼬리가 아프다며 허옇게 질릴 때까지 꼬리에 꽉 꼬리를 물고

성급한 꼬리는 저를 낳은 꼬리보다 먼저 달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러는 사이, 돌들은 하나같이

둥글둥글해졌고

미끌미끌해져서

여기저기 사방으로 흩어져 살았다

 

어쩌다 만나기도 하지만

서로를 도저히 알아보지 못한다

새빨간 거짓말처럼,

눈도 귀도 입도 지워진 얼굴로 모두들

닮아 있었다

 

 


 

 

이명윤 시인 / 돌섬

 

 

손을 흔드는 건 쉽지, 아버지는 말이 없는 사람, 새들이 쉬었다 가기엔 좋지, 아버지는 주먹을 펴지 않는 사람, 어머니가 말했지, 너그 아부지는 일 밖에 모르는 사람, 일 하려고 태어난 사람, 구름이 지나가는 건 쉽지, 여긴 아늑한 목소리의 바다, 스스로 눈을 뜨고 스스로 어두워지는 말들, 사나운 바람이 춤을 추기엔 좋지, 아버지는 저만치 돌아앉은 사람, 부표처럼 떠도는 건 쉽지, 아버지는 가라앉지 못하는 사람, 밤을 기억하는 건 쉽지, 아버지는 통닭을 들고 오던 밤, 통닭처럼 웅크려 자던 밤, 물살을 일으키는 건 쉽지, 아버지는 단단한 사람, 무서운 바다 뜨는 법을 가르쳐 주던 사람, 저녁이 오는 건 쉽지, 아버지는 지금도 목이 마른 사람, 울음을 흔드는 건 쉽지, 아버지는 파도가 끝없이 깨우는 사람, 손을 흔드는 건 쉽지, 아버지는 오래 전 죽은 사람, 다시 손을 흔드는 건 쉽지, 아득히 먼 곳, 아버지는 기억 이전의 거기, 혼자 살아가는 사람.

 

 


 

 

이명윤 시인 / 면사무소를 지나가는 택시의 말

 

 

그 동네 하늘은 면사무소를 따라 돌지. 면사무소를 지나면 농협이 있고 농협을 지나면 중국집이 있고 중국집을 지나면 경운기를 타고 오는 봄날. 면사무소는 늘 그 자리에 면사무소처럼 앉아 면사무소를 지나가는 사람과 면사무소를 흘러가는 구름의 시간에 대하여 회의를 하지. 면사무소는 은밀하게 면사무소라는 말속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지. 언제나 면사무소의 얼굴로. 언제나 면사무소의 자세로. 어디서 왔소? 면사무소에서 왔습니다. 면사무소는 비를 내리지 않고 면사무소는 바람을 만들지 않고 면사무소는 면사무소를 뛰어넘지 않고 면사무소는 면사무소를 따라 느리게 돌아가지.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아, 아, 다시 한번 면사무소에서 알려드립니다.

 

 


 

 

이명윤 시인 / 의자들

 

 

주. 차. 금. 지.

문신처럼 등짝에 새기고 있다

의자의 본분도 잊은

쓸쓸한 농담 같은 쓸모

지나던 행인이

초라한 늘그막에 대하여 모욕을 던지고

쉴 곳 잃은 바퀴들이 등짝을 향해

몇 차례 깜빡이를 켜지만

묵묵히 빈 무릎만 내려다본다

수십 년간 자부심이었다던 회사가

덜컥 그의 등에 붙인 대기발령에

떨구던 눈빛도

빈 무릎을 향해 있었지

뒤로 넘어져도 무릎을 펴지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의자들

의자에게 무릎을 내어주는 것이

의자뿐인 저녁이 관절을 삐걱거리며 오고

서로의 등을 껴안고

기우뚱 건너는 불면의 밤

환한 잇몸을 드러낸 달이 웃는다

선착순 호루라기 소리

뒤뚱뒤뚱 걷는 네 마리 오리들

붉은 페인트 등짝에 새기고,

고장 난 발목 날개에 숨기고

 

 


 

이명윤 시인

1968년 통영에서 출생. 2007년 계간 《시안》으로 등단.  시집으로 『수화기 속의 여자』이 있음. 2006년 전태일문학상. 현재 통영시청에서 집필 업무를 맡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