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학중 시인 / 동전 분수대
동네에 분수대가 생기자 소원을 빌러 사람들이 찾아왔다 어느 날 아침 한 사내가 생수통 하나를 하나 가득 채운 동전을 가지고 분수대를 찾아왔다 그는 분수대에 동전을 묵묵히 던져넣었다 소원이 아니라 하루를 던져넣기 위해 온 그가 가져온 동전들은 처음 보는 외국 동전들이었다 버스 회사 오 년, 누군가 무임승차 때 넣은 외국 동전들을 모으며 버티던 날들 돌아갈 곳이 없는 자들의 기념물인 동전들은 퐁퐁 소리를 내며 분수대에 안긴다 바닥의 동전들은 환전해주지 않아 버려진 동전들과 서로 몸을 포갠다. 분수대에서 하얗게 떨어지는 물방울은 물소리로 동전들을 닦아준다 연인들 몇몇이 소원을 빌고 가고 나무들은 잎사귀를 던져넣으며 내년 봄을 기원했다 분수대는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누구도 고장난 자판기 대하듯 발로 차지는 않았다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이 차비를 빌려갔다 굶주린 사람은 한끼 식사를 위해 동전을 건져갔다 분수대는 말없이 그들의 손을 씻어주었다 젖어도 찢어지지 않는 동전처럼 단단한 소원들을 혼자서만 기록하고 있었다 늦은 밤, 청소부들은 거름으로 팔 낙엽을 쓸어 담고 노인들은 자루에 신문을 주워 돌아갔다 분수는 멈추고 공원엔 작은 가로등 한 개 빛났다 남겨진 동전들은 빛을 받는 행성처럼 빛을 냈고 희미한 물빛이 밤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때까지 돌아가지 못한 사내의 눈가를 몰래 닦아주고 있었다.
김학중 시인 / 창세기 1
둘이 기원이었다 혼자인 것들의 기원 몸의 혈액인 기원 손이 손가락을 낳고 얼굴이 눈과 코와 입을 낳고 귀를 낳고 나의 해골인 너를 위하여 너의 피부인 나를 위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듣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맛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혼자 돌려주고
돌아오는 고요는 그냥 고요가 아니나니 시계를 향해 손을 뻗어 만나서 울지 않는 마주함 둘이 맞잡은 고요가 있다
마른 돌 위로 흐르기 시작한 첫 강물을 아직 강물이라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둘이 고요였다
김학중 시인 / 창세기 7 -퀴푸의 노래
1
소멸한 문자로는 노래할 수 없다고 했어 모든 것이 창조되고 난 뒤에 소멸되는 일곱번째 날 소멸한 문자로 남겨진 날과 사라진 날을 엮은 노래를 다시는 부를 수 없다고 했어
2
네 머리를 땋으며 글자를 만들었지 내 말은 네 귓가에서 사라져 너의 머리칼 속에 깃드는 것들은 따뜻하게 어두워지는 잎사귀의 안쪽 손가락이 닿도록 볼 수 없는 너의 입 한 매듭을 만들 때마다 열렸다 닫히는 여기에 우주는 항상 뒷모습인 거니 풀을 흔드는 바람으로 널 엮어 글자를 만들었지 매듭이 만든 글자엔 이슬이 내려앉기도 하고 바람이 드나들기도 해 흔들리는 글자들의 머리채 숨은 숲으로 너를 안고 나는 길을 떠나 마디마디로 되돌아오는 말로는 다 말할 수가 없어서 노래해 노래의 숨이 만나는 길의 우주 적막 속에서 다 흩어지도록 사라지는 노래는 뒤로 뒤로 발자국도 없이 말없이 난 너의 전부를 안을 수는 없을까 어둠은 가까이 있을 때의 온도 나의 체온을 나눠줄게 따뜻해지렴 길 위로 오는 별의 눈물이 다 타도록 나는 읽을 수 없는 매듭을 묶고 있을게 머리채의 매듭이 늘어가도 너는 여전히 말하지 않는 문자 들리니. 여기 한 세계가 만들어졌다가 사라질 거야. 그래 떠나 어두워진 일곱째 날의 숨 글자들이 남기지 못한 소리들을 가져가 노래가 끝나면 너의 매듭이 완성될 거야 내게는 항상 둘인 너의 귓가에 풍성한 머리채의 글귀
3
창조의 마지막 날에는 사라진 날이 있었고 그날의 노래가 있었다.
*잉카의 결승문자를 말한다. 퀴푸는 새끼 꼬기와 같은 방식으로 중심이 되는 굵은 줄에 여러 가닥의 줄을 묶어 만든 문자이다. 현재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매달렸지만 결승문자의 의미를 완전히 해독해내지 못했다고 한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재무 시인 / 가로수 외 3편 (0) | 2021.09.14 |
|---|---|
| 박종국 시인 / 보물창고 외 5편 (0) | 2021.09.14 |
| 이시경 시인 / 탄(炭) (0) | 2021.09.13 |
| 이재무 시인 / 신발을 잃다 외 4편 (0) | 2021.09.13 |
| 안정희 시인 / 선상처리 외 2편 (0) | 2021.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