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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재무 시인 / 신발을 잃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3.

이재무 시인 / 신발을 잃다

 

 

소음 자욱한 술집에서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한참을 즐기다 나오는데 신발이 없다

눈 까뒤집고 찾아도 도망간 신발 돌아오지 않는다

돈 들여 장만한 새신 아직 길도 들이지 않았는데

감쪽같이 모습 감춘 것이다 타는 장작불처럼

혈색 좋은 주인 넉살 좋게 허허허 웃으며 건네는

누군가 버리고 간 다 해진 것 대충 걸쳐

문밖 나서려는 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찬바람,

그러잖아도 흥분으로 얼얼해진 뺨

사정없이 갈겨버린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구멍난 양심에 있는 악담 없는 저주 퍼부어대도

맺혔던 분 쉬이 풀리지 않는데

어느 만큼 걷다보니 문수 맞아 만만한 신

거짓말처럼 발에 가볍다

투덜대는 마음 읽어내고는 발이 시키는 대로

다소곳한 게 여간 신통방통하지가 않다

그래 생각을 고치자

본래부터 내 것 어디 있으며 네 것이라고 영원할까

잠시 빌려쓰다가 제 자리에 놓고 가는 것

우리네 짧고 설운 일생인 것을.

새 신 신고 갔으니 구린 곳 밟지 말고

새 마음으로 새 실 걸어 정직하게 이력 쌓기 바란다

나는 갑자기 새로워진 헌 신발로, 스스로의 언약을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새 눈

인주 삼아 도장 꾹꾹 내리찍으며

영하의 날씨 대취했으나 반듯하게 걸어 집으로 간다

 

-[창작과 비평] 2005년 봄호

 

 


 

 

이재무 시인 / 개펄

 

 

거친 숨 토해놓고 바지춤 끌어올리고

헛기침 두어 번 뱉어 내고는 성큼,

큰 걸음으로 사내가 밤을 빠져나간 뒤

팥죽 같은 식은 땀 쏟아내고는 풀어진

치마말기 걷어올리며 까닭 없이

천지신명께 죄스러워서 울먹거리는,

불임의 여자. 퍼런 욕정의 사내는

이른 새벽 다시 그녀를 찾을 것이다

냉병과 관절염과 디스크와 유방암을

앓고 있는 여자. 그을음 낀 그녀의 울음 소리

이내가 되어 낮고 무겁게 마을을 덮는다

한때 그 누구보다 몸이 달고 뜨거웠던,

우리들 모두의 여자였던 여자.

생산으로 분주했던 물기 촉촉한 날들은

가고 메마른 몸 속 온갖 질병이나 키우며

서럽게 늙어가는, 폐경기 여자.

그녀는 다 늦은 저녁이나 이른 새벽

지치지도 않고 찾아와 몸을 탐하는

사내가 이제 노엽고 무서워진다

그 여자가 내민 밥상에는 싱싱한

비린내 대신 석유 내가 진동을 한다

 

 [한겨레신문] 7월 29일자 게재

 

 


 

 

이재무 시인 / 어린새의 죽음

 

 

아침 숲길 걷다가 푸른 죽음을 본다

벌써 굳어 선지가 되어버린 피.

송판처럼 딱딱해진 죽음

손 위에 올려놓고들여다 본다

모든 죽음은 산 자들을

경건하고 엄숙하게 한다

비록 그것이 비명횡사일지라도

삶의 옷깃 여미게 하는 것이다

 

그가 남긴 짧지만 두꺼운 서사를 읽는 동안

수목 사이 웅얼웅얼 걸어오는 바람의 기도 소리와

고른 바닥 굴러가는 청량한 물의 독경 소리가

목도리인 양 추워 가늘게 떠는 어깨 감싼다

 

죽음을 살아오는 동안

그는 과연 자유를 껴입고 즐거웠을까

장 속의 새가 부러웠을까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말하지만

자유 없는 비참과 양식 없는 고통을

저 흔한 인습의 저울추로 잴 수는 없다

 

양지바른 언덕 짧게 살다 간

투명한 영혼 잠들지 않고 깨어 있다

묘비명 새겨 마음의 방에 걸어둔다

 

이제 곧 부패의 시간이 그를 다녀가리라

그는 한 마리 벌레 한 그루 나무

한 포기의 풀로 몸 바꿔 또 다른 생 경영하리라

그의 때 이른 죽음에 내 지나온 생과

다가올 생 포개 심고 돌아와

정결히 손 씻고 밥 한 그릇 달게 비운다

 

 


 

 

이재무 시인 / 젊은 꽃

 

 

그의 피부는 검다 그도 한때 남부럽지 않은

푸른 몸의 빛나는 광휘를 지닌 적이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는 가혹한

시간의 시련을 그 또한 벗어날 재간은 없었다

검은 피부는 지나온 생의 무늬일 뿐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하루의 팔 할을 사색으로 보내는 그는

긴 항해 마치고 돌아온 목선처럼 낡고 지쳐 있지만

바깥으로 드리운 그늘까지 늙은 것은 아니다

주름 많은 몸이라 해서 왜 욕망이 없겠는가

봄이면 마대자루 같은 그의 몸에도 연초록

희망이 돋고 가을이면 붉게 물드는 그리움으로

깡마른 몸 더욱 마르는 것을

사랑에 노소가 없다

늙은 나무가 피우는 저 둥글고 환한 젊은 꽃

찾아와 붐비는 나비와 별들을 보라

 

 


 

 

이재무 시인 / 부재에 대하여

 

 

아픈 아내 멀리 요양 보내고

새벽 일찍 일어나

쌀 씻어 안치고 늦은 저녁에 사온

동태 꺼내 국 끓이다

나는 얼큰한 것을 좋아하지만

아이 위해 '얼' 빼고 '큰'하게 끓이다

가정의 우환과 상관없는

저 왕성한 식욕 위해

나의 노고는 한동안 계속되리라

아내에게서 전화가 오면

함께 사는 동안 한 번도

하지 못한, 살가운 말을 하리라

갓 데쳐낸 근대같이

조금은 풀죽은 목소리로 말하리라

 

 


 

이재무 시인

1958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 한남대 국문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석사과정) 수료. 1983년 무크지 《삶의 문학》과 계간 《‘문학과 사회》  등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에는 『섣달 그믐』 외 다수 있음. 산문집으로『생의 변방에서』 그리고 그 밖의 저서로는 『신경림 문학앨범(공저)』, 『대표시 대표 평론(편저)』등이 있음. 2006년 제1회 윤동주상, 2012년 제27회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동국대대학원 · 한신대 · 추계예술대 ·  청주과학대 ·  한남대에서 시창작 강의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