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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국 시인 / 객토(客土)
아직도, 흙에 기대야 할 무엇이 남아 있단 말이지 벌건 흙 기력이 다 떨어진 논바닥에 부려놓고 내뿜는 담배 연기가 만들어내는 동그라미 그 쓸쓸함 속에, 찾아야 할 어떤 것이 있단 말이지
흙의 암시, 들판을 물결치던 걸음은 오래 전 일인 듯 죽어가는 것들의 시선이 따갑다 바닥에 부서져 뒤엉킨 고사리 손 즐비하게 깔려 있다
구슬땀 흘리며 흙을 뿌리는 그는 체질을 개선하느라 잃어버린 그 누군가를 찾느라 흙먼지 풀풀 날리는 바람 속에 서 있다 하얗게 센 머리칼이 번쩍거린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박종국 시집 『집으로 가는 길』, 《세계사》에서
박종국 시인 / 소금꽃
신나게 땀 뻘뻘 흘리며 뜀박질하고 숨바꼭질하다가 둥구나무 아래에서 땀을 식혔다
어, 혁이 얼굴 좀 봐 얼굴에 마른 자국 허연 소금꽃 다른 애들은 괜찮은데 만지면 어석 어석
반찬을 너무 짜게 먹어 남는 소금기 배어나왔나 봐 짜지도 맵도 않아야 건강에 좋다는데
박종국 시인 / 나날들
나날들은 언제나 현재로 놓여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없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아무도 본적 없는 세계가 열릴 때까지
내 마음 창공의 별처럼 알듯 말듯 한 수많은 이야기를 한다
진실한 정원에서만 자라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가 하는 내 마음 그늘과 스며든 여광에 얼룩진 바위까지
미지의 움직임 보랏빛 같이 인류를 변화시킬 움직임 같이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는 깊어지고
꿈과 같이 살아보지 않은 현재로 반짝이는 나날들, 나를 꿈밖의 꿈을 꾸게 하는 세월로 꿈틀꿈틀 지나간다
지나가는 것들이 꿈속의 헛소리처럼 무너지는
그것들,
어느 날 부터인가 뜨락의 나무는 일제히 움을 틔우고 있다 생명의 공간을 향해 가늠 할 수 없는 무서운 힘으로 팽창하는 혐오가 공포를 공포가 신성함을 만들어 내고 있다
박종국 시인 / 배
어머니가 사준 꺼먹 고무신 한 켤레
그 배를 타고 건너지 못할 강은 없다
까맣게 타버린 어머니 속내말고는
박종국 시인 / 흑염소
우리가, 말뚝 박아놓고 매어놓은 고삐만큼 자유가 허락된 흑염소는 우리에게, 책임과 의무의 멍에를 씌워놓고 저를 묶은 밧줄 당기고 당긴다
풀밭에서 목메어 우는 건 우리다
박종국 시인 / 저녁나절이다
스멀스멀 기어오른 벌레 같은 어둠이 능선을 갉아먹는 소리, 놀라 뛰는 노루 뒷발에 채인 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 암노루 궁뎅이가 희끗희끗 산기슭을 적시는 저녁나절이다
그런 틈새에 살아가는 것들, 어슴푸레한 빛 속 어둠이 몰고 오는, 견디기 어려운 푸석거림, 가엾은 마음을 사르는 능선이 붉은 저녁나절이다
어둠이 빛을 지우는 부적 같은 한 장의 그림이 드러내 보이는 숲 속에는 꽃과 잎들이 떨며 진주 같은 이슬방울 떨어뜨리고, 껍질을 하나하나 벗는 산봉우리, 장엄한 시간을 알려주는 저녁나절이다
잃을 것도 없는 것을 잃을까 봐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저녁나절 어둠이 능선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어둠에 익숙한 하늘은 밥풀 같은 별 몇 알 오물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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