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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철규 시인 / 유빙(流氷)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3.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신철규 시인 / 유빙(流氷)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새 하얀 커튼해변의 물거품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신철규 시인 / 다리 위에서

 

 

자동차 앞 유리창에 빗방울이 점점이 박힌다

꽉 막힌 다리 위에서 우리는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흐린 하늘로 철새 떼가 지나간다

시위가 당겨진 활 모양을 한 큰 무리의 새 떼가 날아가고

간간이 뒤쳐진 새들이 그 뒤를 따른다

언제나 앞서가는 것들은 몸속에 나침반이라도 들어 있는 듯이 단호하고 질서정연하다

뒤쳐진 새들의 비관과 자기 위로가 뒤섞인 중얼거림을 듣는다

그들은 그때 갈대밭을 서성이며 딴 생각만 하지 않았어도, 아니 개미들이 먹이를 등에 지고 옹기종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 보지 않았어도 저렇게 뒤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지도 못하고

눈꺼풀을 덮어오는 땀을 닦지도 못하고

두 날개를 조급하게 위아래로 퍼덕이며 날아가고 있다

한 마리, 한 마리, 또 한 마리

간격이 벌어지면서 뒤쳐진 새들의 숫자는 줄어든다

저게 마지막이겠지, 하는 예상은 번번이 어긋난다

 

그들이 먹이를 구하고 한 계절을 보낼 안식처가 그동안 사막이 되었는지

꽁꽁 얼어붙은 빙판이 되었는지

콘크리트로 뒤덮인 죽음의 땅이 되었는지도 모른 채

오로지 믿음 하나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들

그들이 떠나온 세계에는 텅 빈 새장만 남아 있다

 

나는 가장 뒤쳐진 새의 꽁무니를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검지로 천천히 밀어주었다

 

역전과 추월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우리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앞차의 꽁무니만 바라보고 있다

 

나는 핸들을 놓고 두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뒤쪽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에 다시 핸들을 꽉, 부여잡는다

 

계간 『포지션』 2015년 봄호 발표

 

 


 

 

신철규 시인 / 심장보다 높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전기가 나갔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녹슨 슬픔들이 떠오른다

어두운 복도를 겁에 질린 아이가 뛰어간다

 

바깥에 아무도 없어요?

내 목소리가 텅 빈 욕실을 울리면서 오래 떠다니다가 멈춘다

 

심장은 자신보다 높은 곳에 피를 보내기 위해 쉬지 않고 뛴다

중력은 피를 끌어내리고

심장은 중력보다 강한 힘으로 피를 곳곳에 흘려보낸다

 

발가락 끝에 도달한 피는 돌아올 때 무슨 생각을 할까

해안선 같은 발가락들을 바라본다

 

우리가 죽을 때 심장과 영혼은 동시에 멈출까

뇌는 피를 달라고 아우성칠 테고

산소가 부족해진 폐는 조금씩 가라앉고

피가 몸을 돌던 중에 심장이 멈추면 더이상 추진력을 잃은 피는 머뭇거리고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고

할 말을 찾지 못해 바싹 탄 입술처럼

그때 내 영혼은 내 몸 어딘가에 멈춰있을까

물이 심장보다 높이 차오를 때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깊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무의식중에 손을 머리 위로 추켜 올린다

 

무너질 수 없는 것들이 무너지고 가라앉으면 안 되는 것들이 가라앉았다

물속의 얼굴들은 반죽처럼 흘러내렸다

덜 지운 낙서처럼 흐릿하고 지저분했다

 

누군가가 구겨버린 꿈

누군가가 짓밟아버리는 꿈

 

어떤 기억은 심장에 새겨지기도 한다

심장이 뛸 때마다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번져간다

 

나는 무섭고 외로워서 물속에서 울었다

무섭기 때문에 외로웠고/ 외로웠기 때문에 무서웠다

고양이가 앞발로 욕실 문을 긁고 있다

 

다시 전기가 들어오고 불이 켜진다

물방울을 매달고 있는 흐린 천장이 눈에 들어오고

 

어둠과 빛 사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서로를 조금씩 잃어가면서

서로를 조금씩 빼앗으면서

 

납덩이가 된 심장이 온몸을 내리누른다

 

 


 

 

신철규 시인 / 거기, 누구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림자를 깎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는 축축한 벽에 기대어 땅위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둥근 조각칼로 오리고 있었다, 그것을 파내면 자신이 그 골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듯이, 단호하고도 집요한 손놀림으로, 손끝이 부르르 떨린다. 그는 절벽 앞에 선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을 도려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거기, 누구요?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내 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의 때 묻은 손톱이 잠깐, 침침한 가로등 불빛에 반짝, 빛났다. 우리들의 머리 위로 전깃 줄이 잉잉거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작업이 성공할까봐 조마조마했다. 그가 작업을 끝내고 내게 뚜벅뚜벅 걸어 와 내 손을 끌고 그 자리에 나를 앉히고 홀연히 떠날까봐, 두려웠다. 나는 발가락 끈으로 따을 있는 힘껏 누르고 있었다. 그의 작업이 발뒤꿈치를 지나 발가락 끝에까지 다다랐을 때, 그림자가 일어나 그의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나는 뒷걸음치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 축축하고 침침한 골목을.

 

 


 

 

신철규 시인 / 늑대의 진화

 

 

노란 보름달을 보고 있으면

손을 가지런히 모으게 된다

두 손을 땅에 대고 컹컹

짖고 싶다

삶은 계란 노른자를 먹을 때처럼

목이 뻑뻑하고

꼬리뼈가 조금 자라는 느낌이 든다

퇴근길, 덜컹거리는 만원버스 안

엉덩이를 맞대고 있던 그 여자

가릴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던

서로의 꼬리뼈가 닿을 때마다

발톱이 신발을 뚫고 나올 것 같았다

경사진 언덕을 오를 때마다

손을 땅에 대고 걸으면 얼마나 좋을까

계속 바닥으로 쏠리는 얼굴을 들기 위해

엉덩이를 쭉 빼고

집에 와 손을 씻으며

오늘도 손을 더럽히지 않았구나, 안도하며

얼굴을 점점 덮어오는 털을 쓰다듬는다

 

 


 

신철규 시인

1980년 경남 거창 고제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