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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숙 시인 / 청동물고기
흔들려야 바람을 읽을 수 있는 산사 추녀 끝 저 청동물고기는 몇 백 년 전쯤 내가 단청장이였을 때 매단 것인지도 모른다 일주문 밖에서 반배를 올리던 목련 봉오리처럼 참한 곡선을 지닌 너를 본 후 가슴에 사모의 별지화를 그려두고 너를 칠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추녀아래 긴 목 빼고 붓질하는 나를 소리가 날 때마다 올려다보라고 매달았을지도 모를 청동물고기 너는 목련처럼 내게 짧게 피었다 사라지고 붓끝을 따라다니던 내 간절한 기도도 사라지고 달의 옆구리를 돌아 나오는 몇 겁을 지나, 절터 한 귀퉁이 연못의 붉은 잉어로 다시 태어난 내가 몇 백년 전의 숨결을 물고 흔들리는 청동물고기를 올려다보는 밤 달빛에 숨구멍이 모조리 말라 추녀 끝 청동물고기되어 매달린다면 바람으로라도 한 번 쯤 나를 읽어달라고 온 몸 휘저어 물결의 산조로 너를 부르는 그 때 연못가 백목련 꽃잎이 한 잎 두 잎 고름을 풀며 물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별지화(別枝畵) : 사찰 단청시 쓰이는 회화적 기법의 장식화
허영숙 시인 / 고수들
몇몇 사람들이 사린 줄을 지고 물목을 노려본다 성급한 사람은 몇 번 던지다 말고 비늘만 묻은 투망을 지고 다른 물목을 찾아 떠나고
태생이 게으른 천칭자리인 나는 배꽃이 지펴 논 그늘에 앉아 봄볕에 물린 자리를 식히고 있다
오랜 기다림도 고수들의 목록이어서 적막을 견디며 물밑을 읽는 사람이
망 가득 날 것들을 잡을 수 있으나 마음의 재촉이 깊어 오래 숨죽이는 노려봄에는 고요하게 가담할 수 없으므로
시집 귀퉁이로 근질거리는 팔뚝을 긁으며 논다
다행히 올가미를 비켜 갔다고 안도하며 깃드는 물고기나 기다리며 고수들의 진지 그 아래 물목에 통발 하나 걸쳐두고,
허영숙 시인 / 동백 피다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에는 내가 즐겨듣는 노래가 있지
노래가 나오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해마다 바람이 그려놓은 악보들이 마당에 두껍게 쌓여 있지
바랭이, 개망초의 전주곡이 끝난 자리에 이름 모를 풀꽃들이 스스로 지닌 음계를 타고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피었다 지고 도돌이표를 따라 한 무리의 별들이 쏟아져 내리며 합창을 들려주기도 하지
나만 아는 그 집에는 오래 전 당신이 부르던 노래가 있었지 노래가 흘러나오던 입술을 열고 들어서면 잡풀만 무성한 마당, 저음 또는 고음이 가진 당신과 나의 불안한 옥타브를 베어버린 킬링필드, 그 들판에 우리의 노래는 이미 죽고 남은 몇 음절의 노래가 미완으로 남아 있지
달빛만 조명처럼 출렁이었다 사라지는 빈 무대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당신의 노래를 기다리고 있던 겨울 날 집과 집의 경계를 깔고 앉아 당신의 지문이 묻은 악보를 뒤적이는데
성성 날리는 눈발이 피날레를 예고하더니 담벼락 밑에 서 있던 늙은 가수 하나가 목울대를 세우고 붉은 노래를 낭창낭창 부르기 시작했지
그 틈을 타고 오래 가두어둔 한 음절을 기침이 쏟아지도록 따라 불렀지 눈발 속에 당신이 붉게붉게 피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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