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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희 시인 / 무릎의 아바타
수도꼭지가 마른 눈물을 보인 건 꽤 오래 전 일이다 철물점 김 씨를 불러 몇 번 수리를 해도 여전히 훌쩍거린다 팔순 앞둔 어머니 무릎에도 물이 샌다 그 누수엔 대책이 없다며 쇠붙이 무릎 끼워 넣는다 무릎에 세 든 쇠붙이는 제 무릎이 아니다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처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원형은 죽었다 사실 신도 죽었다 우리가 신봉하는 것은 신의 아바타인 것처럼 우리 집 수도꼭지든 어머니의 무릎이든 또 다른 아바타로 살고 있다
2012년 한국문학방송 시부분 당선작
김다희 시인 / 골목
시간의 나이테 같은 길이 둥글게 휘어지며 모퉁이를 지나간다 숨겨진 흔적이 꿈틀거린다 아픈 생각이 이 골목을 지나는 동안 꿈의 모서리가 닳아져 뭉툭해진다 하늘을 찾아가던 어린 날의 숨바꼭질 골목의 어깨보다 더 커버린 지금 골목에 들면 언제나 첫 눈이 내린다 그 골목 끝에는 아직 그 주소가 남아 있을까 골목이 깊어질수록 궁금해진다 부정하고 싶지 않는 상처의 풍경 골목이 굽은 허리를 펴고 내 눈물을 쓸어 내고 있다 그쯤에서 멈추고 싶은 길이여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화장을 지운 술래의 얼굴
김다희 시인 / 어머니의 문자
바코드 넘버 19320628 수천 번을 입력시켜도 숫자는 늘 뒤죽박죽이었다 0에서 9까지 열 개의 조합이 어려운 어머니 치매퇴치용 문자 메시지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숫자 보다 배짱이 맞으신지 글자 수가 나날이 늘어간다 -따라바무거나 딸아 밥먹었나 라는 말이고 -어지소시이음노 어찌 소식이 없노 라는 말이다 식민지의 가난한 딸로 태어나 글 한 자 배우지 못한 내 어머니 가끔은 신문지에 아는 글자 침 발라 꼭꼭 눌러 따라 써보기도 하고 읽어보기도 하는데 손바닥 보다 작은 휴대전화 그 속에 세상이 다 들앉았다고 닦기도 하고 금방울을 달기도 하고 어린 나를 키웠듯 정성이다 띄어쓰기 받침 다 무시해도 나에게는 신통하게 다 해석되는 어머니의 문자
김다희 시인 / 내부로부터의 안부
책을 펴자 모서리를 찢으며 친구의 숨소리 들린다 궁서체가 미세하게 발을 뻗은 갈피에서 편지가 유언처럼 발견됐다 찢겨진 입술 누군가 비밀을 물고 있는 입술에 날 선 칼을 갖다 댄 자국이 붉고 선명했다 갈피갈피 겨울이 익어가는 견고한 내부가 보였다 친구의 안부가 몸을 웅숭그려 먼 길을 걸어 왔던 날, 수십만 마리의 일개미들이 모인 듯 봉투 속은 분주했다 신음 소리가 편지의 몸 밖을 수시로 나들었다 찢겨진 봉투처럼 친구의 生도 오래가지 않아 찢어졌다 나는 그를 외면했다 오늘, 다시 친구를 만났다 편지지에 맨몸을 밀며 묻는 안부가 숨가쁘고 침울했다 세상 모든 나무들 제 몸 말려 겨울을 준비하듯 친구의 겨울은 어디쯤에서 서성이고 있을까 책갈피마다 겨울나무 우는 소리 웅웅 들린다
김다희 시인 / 상처
봄이 산산조각 났다
꽃나무의 정거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무의 입술은 더 검고 어두워져 갔고 만년설 아래 가부좌 튼 氷河氷이 검고 어두운 입술에 수혈을 시작했지만 봄의 기억은 나무의 힘줄을 따라 다시 찾아왔고 그의 갈비뼈 사이사이 면경 같던 얼음이 몸을 찔렀다
나에게도 벚꽃 환하던 봄이 있었다
환한 그의 얼굴 속에도 거미줄처럼 얽힌 상처의 길이 숨어 있어 호요바람이 잦고 갈씬거리는 흔들림에도 허리가 굽었다
산다는 건 환한 꽃에도 상처 내는 일이란 것을 살면서 알았다
봄의 상처 위로 푸른 잎이 돋고 나는 그가 남긴 상처 속의 길을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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