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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녀 시인 / 옛집
이제 옛집 빈터에는 산수유꽃만 사태지고 있다 버즘처럼 썩어가는 모과와 꽃바람에도 꿈쩍 않는 늙은 감나무 옆 부르튼 살결의 산수유 가지 끝에 차마 떨구지 못했던 지난해 붉은 산수유 열매 할머니 쪼그라든 젖꼭지 같다 서둘러 골짜기로 찾아드는 저녁 햇살 붉다 덩그마니 댓돌 위에 앉은 흰고무신 바람그늘 속 그네 타는 노란 꽃귀신들 풍장으로 뼈만 남은 허물어진 담벼락 감싸 안은 초록 넝쿨은 금이 간 장독 안에서 새벽 이슬을 낳는다
김길녀 시인 / 문
너와 나 경계를 지우는 사이 나풀나풀 햇살 걸음 날아와 활짝 꽃, 피우다
김길녀 시인 / 지워지는 집
어쩔 수 없이 버리고 간 귀하의 가을을 만나러 가는 시간은 하루 한번 아침이 시작되기 전입니다
삐걱거리는 통나무 대문 밀치고 들어가서 빈집의 지난밤 안부를 살피며 익어가는 모과 한 번쯤 만져보는 게 전부입니다
공가라는 노랑 종이 탄탄하게 붙은 돌담 저물녘 귀하가 서성거리던 꽃밭에는 지금 과꽃이 한창입니다 굴착기 큰 입으로 뜯어내기 전 노래 속 누이 찾듯이 어느 날 불쑥 하양 대문 밀치며 오시겠습니까
오래전 떠났던 여행길 이름 모를 신전 기둥에 기대어 들려주던 그 문장 그네에 앉아 들려주시겠습니까
한때는 몹시 애정하였으나 이제는 무심해져 버린 이름에게 다시 온기 건네고 싶은 간절함 불어오는 하루하루를 위해
귀하께선 첫눈이 내리기 전에 오시렵니까
김길녀 시인 / 누구신가
듣고 싶은 말보다 하고 싶은 말 더 많았던 한때의 어떤 이 물그림자처럼 천변을 걷고 있다
밥과 사람 냄새 사라진 지 오랜 집터 나무에 핀 꽃잎들 희다
사랑채 있던 자리 어젯밤 봄비에 드러나는 사과나무 장작더미에 덮여 있던 가계의 내력 지쳐가는 돌담과 고양이가 지나간 길 빗물에 섞여 떠나간 것들 흘러가는 중이다
떠나기 위해서는 여기가 필요했겠다 빈터에서 부르는 오월의 노래 언덕배기 사과나무들 붉은 꽃눈 피워내고 있다
누구도 그들이 그곳에서 살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김길녀 시인 / 여자들이 살았던 거리
바람 무게 높게 쌓인 왕궁 회색 지붕 아래로 금발의 전사들이 느린 걸음으로 오고 있다 사내들 어깨위로 흘러내리는 바람의 황금물결 도마뱀 문양 실크 바지 아래로 죽창을 휘두르던 전쟁터의 아우성, 검은 꽃잎처럼 쌓여 가죽 부츠 발자국을 지운다
쓸쓸함이 사라진 거리마다 하루 종일 무거운 비가 내린다
아득한 기억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진눈깨비 속 초록드레스의 여자들 속눈썹이 하얗게 변해버린 여자들이 가문비나무 숲으로 사라진다
연두왕국에서 노랑왕국에서 하양왕국에서 목이 긴 여자들의 얼굴이 으아리꽃 넝쿨처럼 천장 높은 창문 밖으로 휘어지고 있다
석양을 받아 담벼락으로 늘어지는 드레스의 긴 그림자 왕궁 뒤뜰, 왕관이 묻혀 있던 자리에서 금발의 남자들이 지고지고 안개처럼 따뜻하게 여자들이 피어나고 있다
김길녀 시인 / 보들레르와 함께 포도주를 마시는 저녁
제목 없는 당신의 시를 신에게 바치는 기도처럼 읽고 있는 오후라오
인도양 물결무늬 흘러드는 순다해협에서 맞이하는 적도의 저물녘은 붉게 타오르다가 맹그로브 나무 숲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소
미처 살아내지 못한 생의 행간이 있다면 낯선 땅에서 보내는 긴 휴가 속에서 기꺼이, 다시 시작해 볼까 싶다오
시대를 앞서갔던 당신의 문장들은 검은 꽃병에 꽂혀 대문 없는 폐허의 사원에서 뜨거운 햇볕 받아 푸르게 푸르게 피어나고 있다오
당신이 각혈하듯이 쏟아내던 검붉은 꽃의 노래는 지금, 여기의 일만 칠천 개 섬 곳곳에서 핏빛과 분홍 더러는 황금빛 햇살 부스러기로 쓰러지며 먼바다 심해로 빠져들고 있소
권태와 우울과 불안의 나날이 창녀들의 춤과 노래와 죽음, 바다와 수부들과 부랑자들, 태양과 슬픔의 냄새와 뒤엉켜 당신이 남기고 간 시들의 묘지에서 오래된 돌담에 핀 이끼처럼 여전히 잘 자라고 있다오 이곳은 천둥과 번개와 함께 소낙비가 자주 내리는 곳이라오
처음엔 낯설던 천둥의 신 덴무도 건기인 지금은 기다려지기까지 한다오
당신을 처음 만났던 이십 대, 그 시절에는 그저 이별의 아픔에 젖어서 겨울밤을 지새우며 하얗게 울기만 했다오
나로부터의 자유가 두려웠던 그때는, 당신이 품은 바다를 찾지도 볼 수도 없었음을 이제야 고백하고 싶소
다시, 바다가 지천인 이곳에서 만나는 당신은 내가 살고 싶은 외딴섬의 나날 속에 사는 듯하여 마냥 부럽기만 하다오
당신이 건네주는 마지막 유리잔 안에 그득한 취기는 영혼을 저당 잡힌 유령의 입맞춤처럼 뜨겁고 달콤하오
당신의 시 「아름다운 배」에 나오는 포동포동 굵은 목과 퉁퉁한 그녀처럼 감미롭고 나른하고 느린 리듬을 타며, 조용조용 그러나 의기양양하게 난바다로 떠나고 싶소
훗날, 또다시 당신을 만나는 시절이 오면 당신의 하룻밤 애인이 되어 외딴섬 빈집에서 밤을 새우며 밤새도록 술잔을 나누다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오
지금은 당신이 좋아하던 신전의 오래된 정원 작은 방, 녹슨 창문으로 스며드는 적도의 석양에 희미한 눈길 보내며 당신을 만날 어둠을 기다리고 있소
김길녀 시인 / 지금
비우고 비워서 속까지 훤히 드러낸 겨울 숲 나무들처럼 몹시 좋아하는 우울과 적막과 슬픔마저도 찰나의 행간 없이 벙글 벙글 벙글 맘껏 부풀어 오르시라 다만, 식물로 태어나 나무로 살아가는 오래된 생애처럼 아픔을 감춘 채 다가오고 있는 공포만은 느릿느릿 머뭇머뭇 주저하고 망설이며 둘러보고 헤매다가 온전히, 길을 잃어 주시면 좋으리라
지금은, 누군가 지독하게 아프다는 편지를 받고 긴 겨울 안에서 함박눈처럼 쏟아지는 신의 영혼을 가득 품은 연두와 함께 절박한 기도가 담긴 초록 오로라를 기다리며 실어증에 잠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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