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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기원 시인 / 테이블은 듣는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7.

강기원 시인 / 테이블은 듣는다

 

 

죽어, 테이블이 되었다

 

테이블은 듣는다

오전 열한 시

익숙한 그녀의 발걸음 소리

노트북을 펼쳐 자판에 손을 얹은 채 멍하니 바라보다

어제의 이야기를 빠르게 이어가는 소리

에스프레소 흙갈색 향기를 듣는다

 

테이블은 듣는다

오후 두 시

결별을 고하는 남자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는 채

외면한 여자의 가슴이 사선으로 갈라지는 소리

태중의 아기 숨소리

세피아빛 홍차 식어가는 소리

 

테이블은 듣는다

오후 네 시

깨알 같은 글씨의 계약서를 좌르륵 펼치며

채 읽기도 전에 서명란을 가리키는 우렁한 소리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 부딪치는 소리

 

테이블은 듣는다

저녁 여덟 시

연인들의 은밀한 눈빛이 오가는

소리 없는 소리

맞잡은 손으로 테이블은 잠시 데워지고

카페라떼 우유 그림 보얗게 풀어지는 소리

 

빈 테이블 위

유령들의 독백처럼

점점이 흩어진 하루의 부스러기들

쟁반 위에 무심히 쓸어 담는 소리

듣는다, 테이블은

다만, 듣는다

 

계간 『시인수첩』 2021년 봄호 발표

 

 


 

 

강기원 시인 / 전광판 파도

 

 

시내 한복판 전광판 속에서 파도가 친다

넘칠 듯 넘칠 듯

수족관 속에 갇힌 파도의 고래가

밀려와 유리벽에 부딪친다

 

파도 아래 사람들

물 밑의 부유하는 발걸음들

고래 입 속인지 모르는 채 걸어간다

왜 이리 숨이 막히지?

왜 이리 어지럽지?

서로를 의심하며, 흘깃거리며 그러나 무심히

흘러내린 마스크 끌어올려 틈 없음을 다시 확인하고

동공에 서리는 뿌연 풍경을 연신 닦아내며

마른 물속을 걸어간다

 

전광판 속의 파도, 파도 속의 고래

일 분에 열여덟 번 오가는 파랑을 타고

투명한 벽에 온몸을 쉼 없이 부딪쳐온다

깨질 듯 깨질 듯

 

범람의 아슬한 수위를 나누어 갖고 물에 잠긴 도시는 서서히 질식 중이다

말미잘 같던 말들이 사라지고 우리는 서로의 魚種을 분간할 수 없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목소리가 뒤섞이는

臨終夢 속을 생시인 듯 아닌 듯 떠 간다

 

계간 『애지』 2021년 봄호 발표

 

 


 

강기원(康起原) 시인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97년〈요셉보이스의 모자〉외 4편으로 《작가세계》신인문학상 당선. 2014년〈쌍봉낙타〉외 1편 《동시마중》에 발표하며 동시 작품활동 시작. 시집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 『바다로 가득 찬 책』,『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 『지중해의 피』와 시화집 『내안의 붉은 사막』, 동시집 『토마토개구리』, 『눈치보는 넙치』, 『지느러미 달린 책』 출간. 2006년 제25회 김수영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