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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건호 시인 / 변압기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7.

전건호 시인 / 변압기

 

 

  주렁주렁 매달린 식구들 부양하다

  몸살을 앓던 여자가

  끝내 쓰러졌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아파트며 공장이 순식간에 절망에 휩싸였다

  파르르 떨던 가로등도 목을 꺾었다

  밥솥이 끓다 말고

  청국장도 식어버렸다

  웃음꽃 피우던 TV도 멈춰버렸다

 

  여자의 상태는 심각했다

  검은 피가 흥건하게 거리를 적셨고

  구급차 달려와 심장을 수술하는 동안

  집집마다 촛불이 켜졌다

  무관심하던 사람들까지

  소생을 빌며 간절히 기도했다

  누가 저 지경이 되게 방치했냐고

  서로를 탓하며 분개했다

 

  간신히 소생한 여자는

  그날 일을 금방 잊어버렸다

  그녀가 관심을 받아본 건

  그날 그 순간뿐

  오늘도 상처난 몸으로

  허공에 매달려 신음하는데

  쳐다보는 사람 하나 없다

 

 


 

 

전건호 시인 / 꽃점을 치던 그대에게

 

 

늙은 맹인에게 꽃점을 친다.

 

오백년 전생이 궁금한 게 아닙니다.

​왜 이리 고단한 것인지요.내일은 좀 나아질까요.

 

오백년전에 여기서 만났던 그대는 그때도 나에게 이렇게 물었느니,

​언제까지 이런 질문을 던질 것이뇨.

 

​그대의 갈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느니.

뫼비우스의 띠 같은 순환고리에서 잠시 우리가 만난 것이고

지금 돌아서면 오백년 후 쯤 또다시 만나

출구 없는 호리병 속의 가릉빈가를 한탄할 그대와 나, 둘 다 답답하긴 다를 바 없느니.

 

​누구에게 그대의 앞날을 다시 묻지마시게.

너무 많은 것을 알면 슬퍼진다네. 너무 먼 것을 보면 두려워 나아갈 수가 없느니.

​너무 아득한 경계를 듣는다면 분노로 가득찰 일이거늘.

​그저 묵묵히 가던 길이나 가시도록 하게.

 

그대가 한때 사랑의 열병에 빠진 것도, 객기를 참지 못해 훗날을 그르친 것도,

​아니면 뜻하지 않게 남을 속이던 일이며,

​또는 속임을 당했던 것도 오늘을 위한 필연이었음을

그때 예견했더라면 어찌 여기에  

다시 설 수 있겠느뇨.

 

미리내를 거슬러 소용돌이치다 오늘 여기서 또다시 극적으로 만나게 되니 기이한 인연이네.

한 시절 각기 다른 꽃으로 피어나 만화방창 봄날을 철없이 어우러져 흔들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네.

​그냥 가던 길 가시게나. 운다고 옛사랑이 다시 돌아 오지않 듯, 눈 흘긴다고 계절이 멈추겠는가.

​머지않아 꽃은 지고 눈이 쌓인다 하나 그게 끝이 아니라네.

 

몽환 같은 時空도 눈 깜짝할 사이 전광석화처럼 묘연하고 아득하게 사라지곤했으니,

​가던 길이나 묵묵히 가시게나.

​지금 그대가 던지는 질문 또한 그대의 질문이 지난 오백년전 여기를 지나던 누군가의 넋두리가

혼백으로 뭉쳐 그대의 입을 잠시 빌린 것 뿐이니.

 

​그대의 답담함이란 그대의 것이 아닌

지난 생 그대로 인해 사무쳤을 사랑의 애증이 반사되어

그대를 가두고 있는 것이라네,

​그냥 걸어가시다 보면 모든 게 녹슨 거미줄이려니.

​시간이 약이라네.

 

​모든 게 지난 밤 꿈꾸던 그림자와 같으니.

​사랑도 미움도 다 거두시고

그저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가던 길 가보시게나.

​어느 먼 훗날 문득 만나거든

도토리묵에 머위순으로 얼큰한 술이나 한잔 나누시게나 !

 

 


 

 

전건호 시인 / 보름사리 연가

 

 

물살에 휩쓸리는 낙엽 한 장에 시선을 빼앗겨

몸을 버리고 나뭇잎에 옮겨 탄다

탁란!

마음을 떠나보내니

꽃잎 단장하던 육신도 남루한 헌옷이구나

 

흐르는 물살에 몸을 맡기니

상상하지 못한 무색계가 열린다

 

낮은 데로 흐르다보면

그대 내려뜨던 눈썹 밑에

언젠가 도달하리라는 것

 

그대여,

조금만 더 새침하게 몽산포 해변에 앉아계시라

보름사리 가랑잎 하나

밀려올 때까지

달빛 아래 기다리시라

 

-전건호 시집 ‘변압기’

 

 


 

전건호 시인

1961년 충북 영동에서 출생. 한남대 행정학과를 졸업. 2006년 《시와 정신》으로 등단. 시집 <변압기>를 발표. 현재 『시와 정신』 운영위원장. 천태산 문학상, 제9회 한남문인상 젊은작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