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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숙 시인 / 가을, 곡달산
퍼붓던 비 그쳤다 산등성이로부터 쏴아 바람 밀려온다 내 목이 꺾인다 간밤 내내 비에 젖으며 묵언 정진하던 잣나무들, 말할 거야 말해버릴 거야 다투어 소릴 지른다
황토등성이에 불 질러 갈아엎은 퍼런 젊음이 그 혈거시대를 살았던 정염이 곽란을 일으키며 수만 색깔 단풍을 게운다
함석지붕 위에서는 바람이 쿵쾅거리다 굴러 떨어지고 낡은 대소쿠리 하나 걸린 흙 벽담, 그 소리에 놀라 자빠진다 밤새워 제 속을 비워내고도 아직 가슴살이 붉은 저 땡초
문지르는 손바닥에 벌겋게 단풍 물 묻어난다
-시집 <서해와 동침하다>에서
유현숙 시인 / 클림트의 달빛
캔버스의 은유들이 황금빛으로 빛난다 거울 앞에서 머리칼을 빗는 손가락이 또 빛난다 베토벤프리즘의 달빛에서 물 흐르는 소리 들리고 내 몸에는 비가 내린다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도 그때부터 생겼다 손톱을 뜯으며 혼자 우는 것은 사랑이 많아서라 한다 핥고 쓰다듬고 적시었던 날이 아팠던 기억이 때로는 모진 날을 세우며 들쑤시는 건 그 안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 것일까
들쑤신 자국마다 덧나고 부풀어 한 줄의 글도 읽고 쓸 수 없던, 한 생이 다 가도록 한 표적이든 어드 각진 혓바닥을 기억하는가 죽은 말들이 동이째 굴러다니는 가을과 봄
흩어진 산(散木)에서
바람이 일으킨 물결처럼 자주 수수롭다
큰 것은 크게 보이고 작은 것은 작게 보이는 날 있을까 더 오래 사랑하는 것이 더 아름다운 사랑일 수 있겠는가 짧게 이별을 말하는 것이 더 비루한 별리일 수 있겠는가
문을 닫고 돌아앉아야 비로소 밖이 보인다 하여 들판을 달려오는 야마野馬처럼 황량하여 쓸쓸한 아지랑이 숲처럼 그 시간을 다 걷고 돌아앉으면
저녁의 뜨겁고 장엄한 송가를 만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잠시, 아주 잠시만 그리웠던 너와 나와 구스타프 클림트가 한 번 더 빛나던 무어라 이름 짓고 싶던
-시집 『몹시』,《상상인》에서
유현숙 시인 / 외치는 혀
1 청동도끼와 돌촉을 멘 남자가 집을 나섰다
협곡으로 들어간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침엽수림 아래에서 목 긴 짐승이 오래 우는 밤 나는 숨죽이고 불면했다 터진 손으로 부싯돌을 치는 동안 지축이 기울었고 나무는 뿌리째 뽑혔고 눈 속에 파묻혔던 남자가 게놈분석으로 돌아왔다 눈두덩이가 패이고 붉고 서늘하다 갈비뼈 사이에서 물 흐르는 소리 듣는다 남자를 재웠던 내가 흘린 물소리다
잠 든 동안 남자는 무슨 꿈을 복제했는지 별 조각 같은 아이들과 꽃잎처럼 흩어지는 手話와 짐승처럼 허기진 내 언어를 만났는지
윗 이빨에 눌린 혀끝에 눈물 한 점이 얼어 붙어있다
눈이 녹는 동안 새가 우는 동안 그런 만 년 동안 그리웠던 것은 마른 살갗과 살갗이 주고받은 이야기다
2 젊은 머리칼을 날리며 집을 나선 당신은 아직 돌아오지 못하는지 외진 곡벽(谷壁)에 기대어 서서 여전히 궁벽(窮僻)을 꿈꾸는지 나는 지금 어느 골짝의 만년빙에 누워 등이 얼었는지
3 외치는 오래됐고 외치는 낡았고 외치는 헐었고 그리고 말랐다, 혀는 여전히 젖어 있다
*Oetzi : 1991년 북부 알프스에서 발견된 5,300년 된 미라
- 시집 『외치의 혀』에서
유현숙 시인 / 옛이야기
1. 화양구곡 가서 책을 읽네. 내가 사랑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읽네.
몸으로도 빛으로도 바람으로도 만나지 못하는 사랑이었네. 햇볕이 우거지는 여름 뙤약볕 아래서 긴 한나절을 기다렸네. 몸이 빛이 바람이 지나간 시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겠네. 깔고 앉은 이 자리에도 그 사람이 앉았던 자국은 남아 있는지. 반석 한 페이지를 들추며 묻네.
2. 엄마의 마당에는 별이 그득했네. 나는 마당에 내려서서 새벽까지 별을 닦았네. 그 사람이 찾아와 선반에 얹어 둔, 저 구월의 별들을 내려서 오늘처럼 닦을까. 반석 위를 기어가던 그물무늬비단뱀의 초롱한 눈빛을 생각하네. 뱀 울음소리가 들리는 새벽에 나의 안마당에 섰네. 자국마다 박힌 별은 현학적이고 반석에 찍힌 그물무늬는 수사적이네. 현학보다 수사보다 별빛이 더 빛나던 한 사랑의 이야기를 읽네.
-시집 『외치의 혀』에서
유현숙 시인 / 비 젖은 벽암록
비 보다 먼저 바람이 불었다 영화관에 들러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또 한 편의 영화를 더 봤다 영화를 보고나오니 대낮 도심이 비에 젖고 있다 내 생일은 올해도 이렇다 여든 다섯 노모로부터 걱정하는 전화가 왔다
일면식도 없는 시인이 첫 시집을 부쳐왔다 벽암을 찾아 나선다 했다 먼 북쪽 전설의 큰 바다 북명에라도 닿으면 이끼 덮인 바위 틈새에 손 넣어 푸른 말 새겨진 바윗장 하나 집어 낼 수 있을까 북명 같은 벽암 같은 곤의 날갯짓 같은 어록을 받아들 수 있을까
일면식도 없는 시인이 일면식도 없는 시인에게 엽서를 쓴다 첫 시집을 잘 받았다는 첫 엽서를 쓴다
불이의 정토는 넓고 아득하여 나고 감이 고요할까 내가 이 칠월을 버리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시집 『외치의 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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