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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진 시인 / 흐르는 물거울
가야산은 산기슭에 숨은 듯 감춘 폐사된 보원사지를 허허로이 비우고 좌탈입망坐脫立亡하듯 만산홍엽 떨구며 잘 익은 가을을 떠나보낼 채비와 제 몸에 품고 있던 물까지 꾸륵꾸륵 마저 다 토해내고 있었네 옛 영화 아무 흔적도 없고 시작과 끝, 흥망과 성쇠가 너무도 분명한 절대 풍경에 석물石物만 상처이듯 유적으로 남아 한 물결이 만 물결을 따른다고 강당골 계곡 굽어 흐르며 산 그림자 낮추어 물 위를 건너는 햇살에게 육전六錢 소설 이야기 조調로 말씀 이르고 우뚝 선 암벽에 돋을새김 한 웅숭깊은 마애삼존불께서도 폐사지, 그 향내 나는 상처 흐르는 물거울에 살짝 비추어 백제의 미소 푸르고 맑게 씻으시네
박만진 시인 / 개울과 강과 바다
기를 쓰고 피는 꽃 못 보았고 억지로 흐르는 물 보지 못했다 개울물이 흘러 강에 이르고 강물은 마침내 바다가 된다 개울과 강과 바다는 서로 다른 몸이 아니라 한 몸이다 개울은 강의 윗도리며 바다는 강의 아랫도리다 강이 개울물을 받아들이니 제가 저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니 재가 저한테로 흘러가는 것이다
박만진 시인 / 봄의 스타카토
문패가 없는 이웃집 검푸른 대문에 개조심 글씨 키 담장을 치솟은 목련 꽃 살구나무 위에 샤들이 앉아 봄을 재재발거리고 있다 꽃 이파리 반짝 눈물 글썽이고 그때마다 새들의 노래는 잠깐 잠깐씩 끊어진다
박만진 시인 / 감나무
우리 집 감나무, 저 감나무 가지가 우리 집 감나무만은 아닌 듯 이웃집 담장 너머로 뻗어 있다
지긋지긋하던 장마와 더불어 풋감이 뚝 뚝, 떨어지며 이웃집 슬레이트 지붕을 혹 때리고 있어 송구스러움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모람모람 몽니 사납기는 하여도 감나무든 감나무 철부지 가지이든 잘라야 할 까닭이 없다 싶은 것이 홍시를 앉혀 초겨울에 나눠 먹으면 될 일이지 하면서도
지지난해 지난해 내리 가슴에 똬리 같은 숙제 풀지 못하고 지난해엔 변명이 아니라 해거리를 맞아 설상가상으로 나자빠져 낙엽으로 마냥 마당만을 어지럽혔을 뿐
그러저러한 떫은 얘기는 고사하고 숙제 아무 소리도 없으니 더더욱 송구스러울 따름인 것을
우리 집 감나무, 감나무가 우리 것만이 아닌 듯 이웃집 담장 너머로 뻗어 있다
박만진 시인 / 무제無題
날씨 이 세상에서 재일 큰 그릇 구르을 풀어 비로 씻으니
들녘에 바람 하늬로 불고 하늘 맑음
박만진 시인 / 풍경 터치
하늘은 연필로 그리지 않아요 해와 달 그리고 별 혹은 날아가는 새 혹은 전선줄을 그릴 뿐 남는 곳이 모두 하늘이어요
바다를 그릴 때면 조용한 바다이든 사나운 바다이든 제일 먼저 수평선을 그려요 수평선 위에 남는 곳이 모두 하늘이어요
산을 그릴 때면 외로운 산이든 첩첩 산이든 제일 먼저 봉우리를 그려요 봉우리 위에 남는 곳이 모두 하늘이어요
마을을 그릴 때면 초가집이든 기와집이든 함석집이든 제일 먼저 지붕들을 그려요 지붕 아래 애오라지 벽이 세워지고
벽 알맞은 곳에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을 눈썰미도 높게 그려보지만 정말 모를 일이예요 하늘은 연필로 그리지 않아요
박만진 시인 / 펭귄
지구촌 남극 어디에 수도원이 있나
바닷가에 수녀들이 무리지어 살고 있다
박만진 시인 / 첫눈
호수처럼 맑디 맑은 눈빛 그리움과 만나고 싶은 내 가엾은 시어詩語들이 오싹하리 만큼 가난하기 짝이 없구나 바람든 무처럼 숭숭 구멍이 뚫린 어둠을 빌미로 삼아 작은 술잔들에 취한 듯 가누지 못하는 걸음 모양새가 흔들거리는 골목을 돌고 돌아 감나무 집 청대문 앞에 서니 달도 별도 없는 캄캄한 하늘에서 어느 소녀의 편지 같은 첫눈이 오는구나 오, 출렁이는 기쁨이여! 기쁨의 어머니 슬픔이여!
박만진 시인 / 조용한 귀
고요 속에 귀가 있습니다
소년 설총이 참 좋아하던 달밤에 빚은 송편보다 더욱 큰,
비구니가 고개 숙여 합장하는 부처님 같은 귀
까치가 깍깍 깍 그 귀 몹시 쪼고 있습니다
피가 나지 않아 다행이지만 귀걸이가 없는 귀와 귀걸이가 없는 귀에
소슬 바람 부는 길이 있습니다
고요 속에 조용한 귀가 신발처럼 한 켤레입니다
박만진 시인 / 감처럼 불을 켜고
세월의 멱살을 잡고도 오히려 째깍거리며 끌려가고 있는 시간의 꼬락서니를 감처럼 불을 켜고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박만진 시인 / 여름의 상처
아픔이여 가을 햇살을 실패에 감으렴
바늘이 없으면 느낌표를 골라 쓰고
상처를 꿰매는 실로 누두고두고 사용하렴
어둡고 추운 이웃들의 금빛 옷을 지어야지
실패가 넘치면 온몸이 실패가 되렴
때로는 실을 풀어 희망의 연을 날려야지
하여 오는 겨울이 더 없이 따뜻하리니
아픔이여 가을 햇살을 온몸에 감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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