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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림 시인 / 호두 두 알
예쁜 귀걸이 생일선물 받고 귀 뚫으러 보석상에 갔는데요 양쪽 귀에 볼펜으로 점을 찍던 주인 남자 갑자기 총을 들고 덤비는 게 아니겠어요? 겁에 잔뜩 질려 뒷걸음 쳤는데요 그 남자, 보석 진열한 경계를 밀치고 귀를 뚫는 찰나! 비명과 함께 손에 쥐어진 물컹물컹한 호두 두 알 에구머니나! 한쪽 귀만 뚫고 홍당무가 되어 도망치듯 나왔던
몰랑몰랑한 내 스무 살의 추억
-김명림 시집 "어머니의 실타래" 58쪽
김명림 시인 / 어머니의 실타래
어머니의 실타래는 풀어도 풀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실타래 속엔 팔 순 등 굽은 소설책이, 절뚝거리며 걸어온 우여곡절이란 길이 펼쳐져 있다 골다공증으로 걸을 수 없는 깡마른 두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하고 넘어질 듯 휘청거리며 그 길을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왔다 갔다 하시며 내 귀에 발자국을 찍으신다 콕콕 지팡이까지 찍으신다 찍힌 귀에 옹이가 박혀버렸다 이젠 십리 밖에서도 어머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당신의 주름진 세월 너머로 해는 지려하는데 실타래 끝은 보이질 않고 먼지만 폴폴 날린다
김명림 시인 / 고백
추석 다음 다음 날 시어머님 생신입니다 보름달에 가리어 생신 상 한번 변변히 받아보지 못하신 어머님, 흰봉투 슬쩍 건네면서 저희 집에 가시자는 말을 마음이 자꾸 밀어냅니다 어머님의 씁쓸한 미소 가을 바람 거두워갑니다 속내 들킨 것 같아 구두 속에 얼른 집어넣고 나오는데 그만! 마음을 삐끗, 삐고 말았습니다
김명림 시인 / 공범
늦은 밤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쓰레기를 버리러 갔는데요 바람도 매섭게 부는 한겨울 다리 한쪽 없는 어미고양이가 새끼들의 허기진 울음소리 들으며 맛난 냄새 솔솔 풍기는 음식물 찌꺼기 통을 목이 빠져라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그림자에게라도 들킬세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음식물 찌꺼기통, 꽉 다문 입 활짝 열어젖히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요 그날따라 만삭인 달이 제 뒤를 쫓아오며 야릇한 웃음을 흘리는 게 아니겠어요. 설마 저도 머지않아 어미가 될 테니 동네방네 고자질이야 하겠어요?
김명림 시인 / 찔레꽃 필 무렵
외할머니 가슴앓이는 여름으로 가는 길목을 꼭 잡고 놔주지 않았다 보릿고개 힘겹게 넘으며 낳은 맏아들 전쟁터에 나가 생사조차 알길 없으니 쩍쩍 갈라터진 논바닥만큼이나 외할머니 가슴도 시커멓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 어린 나를 당신의 무릎위에 앉히고 네 외삼촌 언제쯤 돌아오나 머리 긁어보라시면 뒤로 가고 있는 내 손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앞머리를 긁으라며 눈짓을 하곤 하셨지만 내 고사리 같은 손은 어느새 뒷머리로 향했었지 앞마당 찔레꽃 가시에 찔려 아픈 줄도 모르고 종일토록 어루만지던 어느 날엔가 앞머리 긁고 있는 다섯 살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다 미역국 한 솥 끓여 놓으시고 아들 환갑상 차려 주러 떠난 외할머니 찔레꽃 푸른 향기 하늘까지 닿았겠다
김명림 시인 / 어머니의 시詩
시를 쓰면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 구수한 된장찌개 끓이는 뚝배기 속에 시가 들어있습니다 호미자루에 묻어나는 풀 한 포기 흙 한 줌에도 시가 묻어 있고 이른 아침 학교에 가는 손에 도시락을 건네주며 이마의 땀방울 닦아내는 수건 한 장에도 시가 묻어납니다 어머니 곁으로 지나는 바람 한 줄기가 시 한 줄을 남겨놓고 떠나도 어머니는 정작 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천상 시인입니다
김명림 시인 / 시어머님
명절, 밥상머리에서 시댁형님 바짓부리를 잡아당겼는데요 대꾸가 없어 자꾸자꾸 잡아 당겼는데요 느낌이 이상해 위를 쳐다보니 시아주버니, 고무줄 바지를 위로 잡아당기고 당겨 반바지를 만들고 계시는 게 아니겠어요?
언제 양복을 갈아입으셨나? 헉, 숨소리까지 멈추는데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조카, 까르르 아리랑 고개 넘어가는데요 쉿! 조용히 하라고 엉덩이를 드는 그 찰나! 바로 그 찰나였는데요 뽀오옹 단풍 물든 얼굴 쥐구멍 찾고 있는 중인데요 녀석, 방귀 소리 한 번 실하네
시어머님께 드리는 두둑한 흰 봉투가 아깝지 않더라니까요
김명림 시인 / 어머니의 속곳 주머니
어머니는 속곳마다 한숨으로 박음질한 주머니를 달아 옷핀으로 봉했다 일곱 살 나는, 어머니의 속곳주머니 속이 궁금하여 어머니가 곤히 잠든 틈에 옷핀을 빼다봤다
눈깔사탕이 눈앞에 아른거려 꼬깃꼬깃 지전을 손에 들고 나오다 낮달한테 들켜버렸다 커다란 눈깔사탕 두 개를 사서 낮달의 입을 막았는데 녀석은 단맛도 채 가시지 않아 어머니께 고자질해버렸다
종아리에 피멍이 들도록 매를 맞고 낮달의 머리채를 잡아 내동댕이치려고 밖으로 나오니 구름이 낮달을 숨겨주고 있었다
뇌출혈로 쓰러진 어머니의 속곳 주머니엔 어머니의 삶처럼 너덜너덜한 만 원 권 몇 장이 마지막 온기를 대신하고 있었다 삼베옷 곱게 입혀 드리고 속주머니에 노잣돈 넉넉히 넣어 옷핀으로 꽂아 드리며 먼 길 가시는 어머니 배웅하였다
김명림 시인 / 부재
헐벗은 감나무 꼭대기 늙은 감 하나
눈보라 속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기다리는 사람 있어서라네
기린처럼 목 길게 빼고 갈대 사걱이는 언덕배기 바라보며 십 년째 소식 없는 아들 기다리네
붉은 피 토하며 죽어 간 짓뭉게진 가슴에 그리움의 씨앗 돌처럼 박혔네
무자식 상팔자라며 시벌, 시벌 장례 치르는 까치떼
김명림 시인 / 탑골공원에는 늙은 비둘기가 많다
지팡이 짚은 비둘기 비틀거리는 공원 삐걱거리는 나무벤치에 앉아 깡마른 무릎 위에 신문 펼쳐 놓고 먼 산 바라기 하는 늙은 비둘기 검정양복을 입으셨다 어디를 다녀오시는 길일까 슬픔에 절은 향 내음 바람결에 묻어온다 매지구름* 검버섯 핀 얼굴 한가운데 떠 있다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아 파고다담배 한 게 피 건네 드렸더니 씁쓸한 담배 연기 속 넋두리 하얗게 피어오른다 깃털 빠진 비둘기들 양지 끝에 모여 앉아 꾸뻑 꾸뻑 졸고 있는 파고다공원에는 늙은 비둘기가 많다 휘청거리며 그 속으로 걸어가고 있는 내가 보인다.
* 비를 머금은 검은 조각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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