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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시인 / 탱자나무
가을 하늘 멍멍히 쳐다보며 어느 낯익은 얼굴 생각하다 탱자나무 흰 꽃잎 뚜욱 뚝 떨어진 줄 몰랐다 탱자나무 엄청난 가시 속에 어느 새 푸른 열매 들앉아 상처로 익어가는 줄 상처 새새마다 그리운 물길 배어드는 줄 몰랐다
오늘 저 하늘 푸른 독으로 가득하다
김영준 시인 / 봄은
늙은 나무 아래서부터 온다 늙은 나무의 기운이 하지로 몰려든 어느 새벽부터 스민다 나무 몸이 풀리면 벌레는 비집고 나설 틈을 찾는다 늙은 나무는 틈이 많다 틈틈이 소리를 넣어두었다가 틈틈이 다독였다가 봄이면 어김없이 소리를 내어놓는다 겨우내 닫아두었던 틈을 밀고 그 소리 따라 벌레가 갸우뚱하는 순간
우듬지에도 온다 묵은 흙 온기가 우듬지까지 오르는 동안 첫 사랑이며 첫 절정 같은, 노래며 함성 같은, 바람과 햇살 같은 것들을 기억에서 하나 둘 꺼낸다 꺼내는 족족 가지마다 걸어놓으며 발걸음 딛는다 기억 하나하나 새순 되어 얼굴 내밀 때를 안다는 듯 경계 너머 산자락을 익숙히 안다는 듯
늙은 나무가 오늘도 하늘을 우러르는 이유 개울물이 끄덕이며 끄덕이며 흐르는 이유를 되새김하는 그런
김영준 시인 / 십우도十牛圖
참 멀고도 먼 길이네 가는 길 곳곳 말 없는 발자국은 보이나 정녕 소는 눈에 띄지 않네 눈에 띄는 건 부러진 발목이거나 떼어버린 꼬리뿐이네 발목만이 서걱서걱 발자국 남기고 꼬리만이 헤프게 울어대네 울음 따라가다 버리고 싶은 마음만 길바닥에 뒤엉켜 있네 자꾸만 채찍질 같은 읍소를 하고 있네
담장 위로 날아가는 뿔을 보네 뿔만 보이네 뿔만 보네
소들은 모두 그림 속에 들어가 나오질 않네 그림 속에서 퇴색하는 흔적만 겨우 남긴 벽이 되었네 결코 울지 않네 침묵조차도 용납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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