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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진 시인 / 모과에 대한 단상
방 한 모퉁이 책상 위엔 한 열흘 전쯤 고향 집에서 주워온 모과 한 개 덩그러니 놓여있다 낯설이 해서 그런지 얼굴색이 노래지고 주근깨 같은 까만 점도 후벼 파주고 싶을 만큼 생겼다 그 단새 구멍 두어 군데 숭숭 나 있는 흠집 나의 귀지 같은 더께 덕지덕지 앉은 구멍 속 한참 들여다 본다 흠집은 암갈색으로 점점이 번지는 중이다 더군다나 몸통은 밀가루 반죽 짓이겨놓은 듯 울퉁불퉁 하다 과일 망신 다 시킨다는 모과 온몸 쥐어짠 기름 반들반들 내뿜으며 웅숭깊은 향 풍긴다 아, 저 향수 속으로 나를 찾아 나서면 언제쯤 그곳에 가닿을 수 있을까 못생긴 인형처럼 앙증맞은 한 개구쟁이가 내 맘을 온통 다 파먹어 들고 있다
김욱진 시인 / 씨/시, 앗!
섣달 그믐밤 연탄 한 장 피워놓고 골방에 누워 감 홍시 하나 물컹 삼켰더니 고놈의 씨가 목구멍에 걸려 넘기지도 토하지도 못하고 밤새 끙끙거리다 시가 되어버렸다 것도 모르고 날로 꼴깍 삼킨 시 명치에 딱 걸려 오도 가도 못하고 고놈의 시를 살려봐야겠다고 용을 쓰고 있는데 새벽녘 안도현 씨가 씨익 웃으며 찾아와 감이 익으면 삼킬 것도 토할 것도 없이 다 시가 된다고 그러지 뭔가 씨가 시가 되는 건 감이라고 죽은 시를 살리는 것도 감 날로 삼킨 시를 푹 삭히는 것도 감 뭣이 죽은 듯 살아 있는 감이라고 설날 아침 제상 맨 앞줄 터줏대감처럼 앉아 절 받는 감 씨가 그랬다 너의 고조모는 성주 이씨, 증조모는 장수 황씨, 조모는 인천 이씨 씨가 뭔줄도 모르고 시집와서 그냥 씨뿌리고 산것도 감이라고 지방문에 걸렸다, 그게 다 시가 되어 불씨처럼 화끈 달아오르면 감은 요리조리 데치고 볶고 삶고 그걸, 다 우려낸 게 시 아니 씨라고 그러지 뭔가 앗!
김욱진 시인 / 마음 녀석
늘 분주하다 역마살이 끼었는지 밤낮 어딜 그리 돌아다닌다
이놈아, 밥값 내놔라 빈둥빈둥 놀고먹지만 말고
툭하면, 욱하고 뛰쳐나가는 녀석 버르장머리 뜯어고치겠다고 덩달아 버럭 화를 내다보면 고놈의 성질머리는 오간 데 없고 내 빚만 덩그라니 남는다
다시는 속지 말아야지
어딜 가서 도둑질하든 굶어 죽든 그냥 내버려 둬야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하, 고놈의 생각 귀신처럼 딱 달라붙어 날 요리조리 잘도 부려먹는다
나도 아닌 나를 나라고 우겨대는 고 녀석, 빚은 누가 다 갚을꼬
김욱진 시인 / 나는 찍혔다, 고로 존재한다
그는 갑이고 나는 늘 을이다, 라는 생각 문득 아침밥 먹고 나서는 현관 지문인식기에 찍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지하주차장에서도 심지어 집 앞 골목을 지날 때도 나는 찍혔다 차 안에서도 아예 동영상으로, 그것도 풀로 찍혔다 을인 척하며 졸졸 따라다니는 갑 이보다 더 알미운 갑질 또 어디갔을까 싶다가도 나는 그를 상전처럼 모시고 다닌다 그는 항상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가는 곳마다 그의 눈도장을 찍고 눈치 봐야만 했다 나도 모르게 그래졌다, 마저 찍혔다 그는 본대로 들은대로 어딘가에 쏙쏙 일러바치는 전문 스파이 같다 땟거리 구하러 나온 고양이처럼 눈알 뱅글뱅글 돌리며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찍어댄다 출근 시간 쫓기다 찍히고 차 끼어들다 찍히고 나는 눈엣가시처럼 콕콕 찍혔다 점심때 자장면 시켜 먹고 이빨 새 낀 고춧가루도 퇴근 무렵 화장실 거울 앞에서 찍혔다 온종일 빈껍데기처럼 끄달려 다니는 나는 찍혔다, 찍었다 찍혔다와 찍었다 사이 나는 다큐멘터리 한 편을 찍었다, 파노라마처렁 찍혔다가 사라지고 찍었다가 등장하는 순간 졸지에 나는 갑, 그는 을 기분 좋은 하루였다 나는 찍혔다, 고로 존재한다
김욱진 시인 / 거울을 보는 새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경구 한 줄 적힌 수돗가 거울 앞 참새 한 마리 날아와 앉아 두리번두리번 살피다 거울 뚫어져라 유심히 들여다본다 여기, 지금, 나는 누구인가 묻고 있는, 참 새는 나를 보더니 놀란 듯 민망한 듯 발가락 오므리고 쫑쫑 수돗가로 걸어가 똑똑 떨어지는 물 한 방울 콕콕 쪼아 먹고 거울 밖으로 훨훨 날아오른다 나는 새다 나는 새다 그러는 새, 나는 새는 수도꼭지만 멍하니 쳐다보다 거울 속으로 돌아왔다 안밖없는 저, 허공 한 무더기 새는 또 어디로 돌아갔는가
김욱진 시인 / 노모일기 1
청춘에 한 남자를 잃고부터 이 세상 더 잃을 게 뭐 있냐며 있는 거 없는 거 다 퍼주고 살아오신 어머니 구순 고개 훌쩍 넘더니만 이승도 저승도 다 내 것으로 보이시는지 담 너머 옆집 애호박도 그저 따오고 간간이 건넛집 밭뙈기 상추며 정구지도 뜯어오고 이 골목 저 골목 떠돌아다니는 욕이라는 욕마저도 버젓이 빈 병 하나 비닐봉지에다 다 주워 담아 오고 그렇게 쓸쓸히 주워 모은 하루하루를 금세 잊어버리는 낙으로 살고 계시는데 그 하루 한시가 못잊어 전화라도 드리면 이젠 그늘도 그립다 젊은 그 영감, 정신 바짝 차리고 살라더니 밤이면 밤마다 날 붙들고 늘어지는 통에 살맛이 난다 그러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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