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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시인 / 항아리
물이 반쯤 찼다고 항아리 웃네 항아리 옹알이 하네 물이 반쯤 찼다고 항아리 배불뚝하네 물이 반쯤만 차도 꺄르르 웃는 오, 항아리는 튼실하여라 항아리 저리 의젓하니 물맛도 똑똑해지네 젖살이 올라 물이 통통해지네
-{애지}, 2021년 여름호에서
송찬호 시인 /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 놓았을까 모락모락 밥집 위로 뜨는 희망처럼 늦은 저녁 밥상에 한 그릇씩 달을 띄우고 둘러앉을 때 달을 깨뜨리고 달 속에서 떠오르는 노오란 달
달은 바라만 보아도 부풀어 오르는 추억의 반죽 덩어리 우리가 이 지상까지 흘러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빛을 잃은 것이냐
먹고 버린 달 껍질이 조각조각 모여 달의 원형으로 회복되기까지 어기여차, 밤을 굴려 가는 달빛처럼 빛나는 단단한 근육 덩어리 달은 꽁꽁 뭉친 주먹밥이다. 밥집 위에 뜬 희망처럼, 꺼지지 않는
송찬호 시인 / 울부짖는 서정
한밤중 그들이 들이닥쳐 울부짖는 서정을 끌고 밤안개 술렁이는 벌판으로 갔다 그들은 다짜고짜 그에게 시의 구덩이를 파라고 했다
멀리서 사나운 개들이 퉁구스어로 짖어대는 국경의 밤이었다 전에도 그는 국경을 넘다 밀입국자로 잡힌 적 있었다 처형을 기다리며 흰 바람벽에 세워져 있는 걸 보고 이게 서정의 끝이라 생각했는데 용케도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이번에는 아예 파묻어버리려는 것 같았다 나무 속에서도 벽 너머에서도 감자자루 속에서도 죽지 않고 이곳으로 넘어와 끊임없이 초록으로 중얼거리니까
-시집 『분홍 나막신』 2016
송찬호 시인 / 달팽이 전세 계약서
달팽이가 콩잎과 전세 계약을 했다
둥글넓적한 콩잎 마당에서 여름 동안 살다 가기로 했다
태풍이 불어 콩잎이 뒤집히거나 해서 콩잎에 붙어 있던 달팽이집이 땅으로 똑, 떨어지면
그때 전세 계약이 끝나는 걸로 계약서에 서명했다
ㅡ『시와 동화』 (2020, 가을호)
송찬호 시인 /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송찬호 시인 / 눈사람
내가 시간에 쫓겨 헐레벌떡 열차에 뛰어올랐을 때 내 옆자리 창가에 눈사람이 앉아 있었다
찌는 듯한 한여름인데도 눈사람은 더워 보이지 않았다 겨울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 털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땀도 흘리지 않았다
눈사람의 모습은 뭐랄까 기나긴 겨울전쟁에서 패하고 간신히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상이군인 같았다 어느 해 겨울 선거에 패하고 흰 붕대를 하고 다니던 사람들 모습의,
눈사람은 나를 향해 한 번 희미하게 웃는 듯했다 찌는 듯 더워도 그의 흰 피가 흘러내려 의자의 시트를 더럽히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이상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열차는 한 여름 밤 자정을 향해 끝없이 달렸다
얼마쯤 달렸을까 깜빡 졸다 깨어보니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는 어디쯤에서 내린 걸까 털모자나 목도리 하나 남겨두지 않고
송찬호 시인 / 동백이 활짝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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