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수환 시인 / 쌍계사 삼지닥나무
나무는 풍경을 위해서 절간에 있었다 쌍계사 뻐꾸기가 울지 않는 것을 보면 화개면 대나무도 하동 포구의 물싸리도 아무 소용 없는 잡목이었다 마른 개천에서 천국을 찾으려면 누구든지 자신을 해명할 수 있어야 하건만 쌍계사 삼지닥나무처럼 절간에 빌붙어서 범종 소리 겨울 뻐꾸기나 기다린다면 천국은커녕 앉은 자리에 버섯이나 돋겠지
안수환 시인 / 콩누룽지
내가 이분을 놓치면 혜암 스님은 대뜸 깡마른 몸집을 나뭇잎 뒤쪽에 숨길 모양이었다 내가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연적이 참 아름답군요 어디가 아름다운가? 색이 곱군요 퍽 오래된 물건이지요? “그건” 졸린 듯이 스님이 응답했다 색이라든가 오래된 것하고는 무관하네 그럼 요긴한 것이 무엇입니까? 속이 뻥 뚫려서 물을 담는 것이지 경상도 고성에서 왔다는 정보살이 콩누룽지 한 접시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스님은 앉은 채 코를 골고 주무셨다
안수환 시인 / 나뭇잎
나뭇잎 사이로 당신이 오기 전에 뱀은 도둑처럼 지나갔다 햇빛 한 자락 덮고 머리카락 빗질하는 내 손 질긴 찔레넝쿨을 꺾으며 당신이 오는 자리를 비워 놓았다 이 나무 저 나무 매미가 우는 대로 털을 세운 피부로는 당신이 확인되지 않았다 내 춤은 누가 보고 있는지 공중에 매달려 물방울을 튕겨도 하늘만 남고
안수환 시인 / 그늘 찾기
잠자리는 풀끝에 앉아 있다가 산풀을 쓰러뜨리는 우리의 살을 보고 날아다닌다 우리는 아무 데나 있지 상쾌한 풀물 위에 날아다니는 날개라든가 머언 산 뻐꾸기
안수환 시인 / 한식(寒食)
어머니 아버지가 누워계신 곳 아내와 자식놈을 데리고 올라왔다
밥 식는다 이것들아 얼른 밥 먹어 어머니는 길을 떠나시다가 말고 그렇게 이르셨다
겨우 오늘 하루 어머니 아버지 안전에 찹밥 한 덩이를 꺼내놓을 뿐
절하고 일어나서 나는 참나무 회초리를 만들었다
안수환 시인 / 쑥을 캐며
죽은 시인의 무덤가에서 나는 어린 딸년과 함께 쑥을 캤다
개똥밭 다북쑥의 미모와는 달리 어떤 쑥은 작년 재작년 가시밤송이의 빈집들을 제 알몸을 구부려 덮어 주었다
순성면 갈산리 논두렁 밭둑 꽃다지 논냉이들도 깨끗하다
이 봄볕을 보고 있는 동안 그렇다면 죽은 시인이거나 가랑잎이거나 이분들은 저 혼자 쓸쓸할 리 없을 것이다
안수환 시인 / 무위(無爲)
소경 바디매오는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목에 서서 낡은 옷을 벗어던지고 선생님 선생님 이렇게 간절히 신을 불러댔다
신은 소경의 눈을 고쳐주었다
흔들흔들 나는 우리 동네 언덕배기를 오르내리며 혼자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길목을 지키던 까치들이 이런 내 얼굴을 보고 아는 척도 않지만
* 마가복음 10:46-52
안수환 시인 / 나무를 심으며
늙은 유생처럼 나는 허공에게 눈길을 주고 만첩(萬牒) 비문 따위를 썼으나
삽으로 땅을 팠다
육경에 실린 말보다도 씩씩한 토질이 내 발바닥을 간지럽힌다 친구여, 40년 내 친구여 귀밑머리 백발을 걱정하지 마라
이 나무 잘 자라서 성곽을 넘으면 허공을 넘으면 한 평의 수확으로도 천년을 덮을 테니
안수환 시인 / 그 후
두보 논어를 읽다가 덮어버리고 나는 이따금 중앙시장 뒷골목으로 나가본다 채소전 홍씨 아주머니가 내 친구라는 것을 홍씨네 실파 꼬부라진 됫박 새우들이 다 안다 정말이지 호고(好古) 호고라고 떠들은 공자의 말씀이 실없는 소리였다
잡숴 봐 잡숴봐 이 새우젓국물이 얼마나 달다고
안수환 시인 / 진흙, 귀를 만지는 사내
자금성 태화전(太和殿) 동편 회랑에 들어가 귀를 만지고 있는 사내와 마주쳤다
달마가 이곳에 오기 전 남북조 위진이 있기 전 그러니까 춘추전국시대의 대머리 펑서방
모자를 눌러쓴 채 한쪽 귀를 틀어쥐고 있다
예끼, 이 사람 아직도 귓구멍에 담을 말을 골라낸단 말인가?
안수환 시인 / 청명
우르르하는 소리가 내 뱃속에서 났다
침을 삼키며 회개하거니와 나는 너무 인색하게 살았다
우리집 바퀴벌레들이 이를 악물고 문틈으로 재빨리 달아났다
반짝 햇빛이 들었다
안수환 시인 / 실직
부슬비가 내렸다 실직한 경자 아버지를 불러내 한 잔 해야겠다 담배 한 갑도 사서 같이 피우며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IMF의 주범들을 입에 넣지 않겠다
희미한 불빛 아래 철원 분지 떠도는 염소 이야기나 하며
안수환 시인 / 추억
깨진 양동이의 주둥이에 철사를 두르고 계신 할아버지 곁에 나는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대추나무에 참새들이 매달려도 오줌이 마려워도 나는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다
내 생각으로는 그 날 할아버지 수염에 맺힌 콧물방울까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적합한 것 뿐이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양민주 시인 / 아버지의 늪 외 1편 (0) | 2021.09.20 |
|---|---|
| 강대선 시인 / 오거리 포차 외 8편 (0) | 2021.09.20 |
| 송찬호 시인 / 항아리 외 6편 (0) | 2021.09.20 |
| 안차애 시인 / 초록을 엄마라고 부를 때 (0) | 2021.09.20 |
| 이은봉 시인 / 오얏나무 이야기 (0) | 2021.09.2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