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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선 시인 / 울며 사과 먹기
윗집에서 일방적으로 보내온 사과상자 이건 사과가 아니다 밤마다 내 잠 속을 콩콩 뛰어다니는 어린 캥거루의 발목 쿵쿵쿵 주방으로 욕실로 돌아다니는 하마의 엉덩이 사과도 아닌 것이 사과 이름표를 달고 사과 흉내를 내며 사과인 척 공손하다 입만 열면 뻔한 변명, 뻣뻣한 반성, 꺾이지 않는 일방통행 고집불통의 이 상자 사과를 내 입에 물리고 밤낮없이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닐 결국, 내 숨통을 틀어막을 의뭉스런 빨간 속내를 알면서도 뜯고 이렇게 흉보는 나를 들키지 않으려고 마지못해 억지춘향으로 뜯는다 캥거루가 하마가 훨훨 새가 되어 날아갈 때까지 내 입과 귀는 진공포장 된다
《학산문학》2009년 가을호
오명선 시인 / 노을
남원장터 무료로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아저씨 묵은 짠지며 텃밭에서 따온 깻잎을 팔던 할머니, 손을 놓고 의자에 앉는다 쪼글쪼글 주름진 얼굴에 햇살이 가득하다 사진을 찍다말고 아저씨가 묻는다
좋으세요? 좋지, 저 세상으로 꽃가마 타고 시집갈 때 가져갈 건데
누런 이가 또 웃는다
- 오명선 시집, 『오후를 견디는 법』(현대시시인선119)
오명선 시인 / 빗나가는 예의
화장은 여자의 기본 예의라고 하는데 한쪽 눈을 감아야 하는 아이라인, 나로선 엄두도 못 낼 일
20년째 내 예의는 어린 아들 허벅지에 덮친 국그릇이고 자지러지는 울음을 받아낸 밥상이고 시시때때로 욱신거리는 2도火傷이다
속 모르는 사람들 늘 비껴가는 인사에 싸가지가 없어, 싹수없어, 나를 오독했고
예의바른 두 눈의 너와 한쪽 눈밖에 없는 나의 거리가 언제나 어긋나는 사랑처럼 멀기만 하다
차단된 내 오른쪽 길,
거울 앞에 앉아 아이라이너 펜슬을 든다 번번이 빗나가는 예의가 캄캄하다
- 시집『오후를 견디는 법』(한국문연,2012)
오명선 시인 / 돌의 잠
그리하여 햇살 한 번 쬐지 못하고 여름을 보냈다 긴 장마가 여름을 다 소비한 것
발이 그려놓은 무늬가 신발이 될 때까지 새를 앉힌 말뚝이 허공이 될 때까지, 바닥에 날개를 짓이기며
무르팍으로 키워온 숲이기에 저녁은 새의 둥지를 다 가져도 펴지지 않는 등이다 누가 저 등에 얹힌 단단한 잠을 깨울 것인가
긴 생각을 지우듯, 문득 돌은 잠행하는 침묵이 아니라 앞 장을 읽고 있을 때 이미 뒷장의 결말이 책장을 덮는, 한 권의 소설이라면
온 몸으로 울음을 토해낸 저녁은 깊은 어둠이거나, 설익은 열매일 것이다
새를 물고 가는 노을이 달빛을 완성하는 동안 열리지 않는 계절은 벽으로 기댈 수 있을 거라는 마지막은 아프지 않을 거라는, 살찐 짐승들의 동정을 돼지꼬리표로 묶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대답 없는 봄의 안부를 베고 누워 죽은 새의 깃털을 빗질하는 구름의 시간, 수천 년을
걸어온 발이 한 점 바람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람이 신발을 다 신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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