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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명선 시인 / 울며 사과 먹기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1.

오명선 시인 / 울며 사과 먹기

 

 

윗집에서 일방적으로 보내온 사과상자

이건 사과가 아니다

밤마다 내 잠 속을 콩콩 뛰어다니는 어린 캥거루의 발목

쿵쿵쿵 주방으로 욕실로 돌아다니는 하마의 엉덩이

사과도 아닌 것이 사과 이름표를 달고 사과 흉내를 내며 사과인 척 공손하다

입만 열면 뻔한 변명, 뻣뻣한 반성, 꺾이지 않는 일방통행

고집불통의 이 상자

사과를 내 입에 물리고 밤낮없이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닐

결국, 내 숨통을 틀어막을

의뭉스런 빨간 속내를 알면서도 뜯고

이렇게 흉보는 나를 들키지 않으려고 마지못해 억지춘향으로 뜯는다

캥거루가 하마가 훨훨 새가 되어 날아갈 때까지

내 입과 귀는 진공포장 된다

 

《학산문학》2009년 가을호

 

 


 

 

오명선 시인 / 노을

 

 

남원장터

무료로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아저씨

묵은 짠지며 텃밭에서 따온 깻잎을 팔던 할머니, 손을 놓고 의자에 앉는다

쪼글쪼글 주름진 얼굴에 햇살이 가득하다

사진을 찍다말고 아저씨가 묻는다

 

좋으세요?

좋지, 저 세상으로 꽃가마 타고 시집갈 때 가져갈 건데

 

누런 이가 또 웃는다

 

- 오명선 시집, 『오후를 견디는 법』(현대시시인선119)

 

 


 

 

오명선 시인 / 빗나가는 예의

 

 

화장은 여자의 기본 예의라고 하는데

한쪽 눈을 감아야 하는 아이라인,

나로선 엄두도 못 낼 일

 

20년째 내 예의는

어린 아들 허벅지에 덮친 국그릇이고 자지러지는 울음을 받아낸 밥상이고

시시때때로 욱신거리는 2도火傷이다

 

속 모르는 사람들

늘 비껴가는 인사에

싸가지가 없어, 싹수없어, 나를 오독했고

 

예의바른 두 눈의 너와

한쪽 눈밖에 없는 나의 거리가

언제나 어긋나는 사랑처럼 멀기만 하다

 

차단된 내 오른쪽 길,

 

거울 앞에 앉아 아이라이너 펜슬을 든다

번번이 빗나가는 예의가 캄캄하다

 

- 시집『오후를 견디는 법』(한국문연,2012)

 

 


 

 

오명선 시인 / 돌의 잠

 

 

그리하여 햇살 한 번 쬐지 못하고 여름을 보냈다

긴 장마가 여름을 다 소비한 것

 

발이 그려놓은 무늬가 신발이 될 때까지

새를 앉힌 말뚝이 허공이 될 때까지, 바닥에 날개를 짓이기며

 

무르팍으로 키워온 숲이기에

저녁은 새의 둥지를 다 가져도 펴지지 않는 등이다

누가 저 등에 얹힌 단단한 잠을 깨울 것인가

 

긴 생각을 지우듯,

문득 돌은 잠행하는 침묵이 아니라

앞 장을 읽고 있을 때 이미 뒷장의 결말이 책장을 덮는, 한 권의 소설이라면

 

온 몸으로 울음을 토해낸 저녁은

깊은 어둠이거나, 설익은 열매일 것이다

 

새를 물고 가는 노을이 달빛을 완성하는 동안

열리지 않는 계절은 벽으로 기댈 수 있을 거라는

마지막은 아프지 않을 거라는, 살찐 짐승들의 동정을 돼지꼬리표로 묶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대답 없는 봄의 안부를 베고 누워

죽은 새의 깃털을 빗질하는 구름의 시간, 수천 년을

 

걸어온 발이

한 점 바람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람이 신발을 다 신을 때까지

 

 


 

오명선 시인

1965년 부산에서 출생. 부산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9년 《詩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오후를 견디는 법』(한국문연, 2012)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