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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여국현 시인 / 새벽에 깨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1.

여국현 시인 / 새벽에 깨어

 

 

비바람이 치는 새벽

잠든 아이들의 방문을 열어본다

 

나란히 모로 누워 다리까지 같은 모양으로 올리고

두 아이 함께 잠들어 있다

얼마 만인가

나는 또 얼마만인가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같은 모습으로 새근거리며 잠든 모습을 보며

아이의 발가락을 가만히 잡고 있으면

눈물이 났다

 

무엇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던

열아홉 절망의 봄

바람에 맡기듯 나를 맡겼던 어두운 바다

집어등 환하게 밝히며 나서서

새벽 어스름을 등지고 조용히 돌아오던 고깃배

위에서 흔들리던 삶은

경건하고 두렵고 눈물겨웠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잠든 아이의 발가락을 가만히 잡고 있으면

그 바다가 전하던 심연의 침묵이

웅웅거리며 들려오곤 했다

그 소리에 잠겨 유영하다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온기를 타고

그만 아이의 꿈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늦겨울 비바람에

마음이 흔들리는 새벽

가만히 열어본 아이들의 방

두 아이는 곤한 잠 속에 빠져 있고

나는 잠든 아이의 발가락을 가만히 잡고 있다

 

경건하고 따스하며 눈물겹고 두렵다

잠든 아이의 맨발을 통해 전해오는

삶은

 

 


 

 

여국현 시인 / 아이러니

 

 

몇 편의 어두운 영화를 연이어 보면서

뿌리 깊고 야비한 어둠과 악의 재현이 끔찍해

스크린 속 세계라는 사실에 안도하다가

같은 스크린이 담담하게 전하는 현실의 뉴스를 보며

영화 속 세계를 외려 그리워한다

틀에 박힌 권선징악 허구의 엔딩이라도 존재하는.

 

시집 『새벽에 깨어』 중에서.

 

 


 

여국현 시인

1965년 강원도 영월에서 출생. 방송대 영문학과 졸업. 중앙대서 영문학 박사 학위 받음. 2018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셀레스틴 부인의 이혼』, 『크리스마스 캐럴』 등의 소설을 번역, 『하이퍼텍스트 2.0』 외 다수의 이론서를 공역. 현재 상지대 겸임교수 거쳐 중앙대, 방송대에서 강의. 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