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 시인 /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황인찬 시인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밀었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 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죽은 사랑은 집 앞을 서성이다 떠나갔다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이런 시에선 시체가 간데온데없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날 공원에 다시 가보면 사랑의 시체가 두 눈을 뜨고 움직이고 있다
황인찬, 『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 2019, 150~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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