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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지호 시인 / 안국역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4.

홍지호 시인 / 안국역

 

 

친구와 안국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어제 마신 술과 어제 들은 이야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귀신을 본다는 친구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자꾸 말을 걸어

자꾸 말을 걸어서 힘들다고 했습니다

 

친구는 무슨 말을 들으면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못 믿겠다는 말은 하지 못했습니다

 

친구가 울면서

이게 시냐, 내가 시를 쓰고 있는 것이 맞으냐

물었습니다

 

나에게는 친구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친구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안국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안국역에는 사람이 많았으나

귀신은 육체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친구의 말을 들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의 육체는 친구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안국역의 대합실은 지하 1층과 지하 2층에

승강장은 지하 3층에 있으며, 출구는 6개입니다

 

믿을 수 없는데도

청력을 극복하여 들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친구야

여기가 안국이냐

여기가 정말 안국이 맞으냐

 

친구는 아직 안국을 찾지 못한 모양입니다

 

나는 아직 친구를 믿지 못하는 육신이며

 

안국에서 만나자 꼭 안국에서 만나자

울먹거렸습니다

 

- 월간<현대시> 2020년 12월호

 

 


 

홍지호 시인

1990년 강원도 화천 출생, 고려대 문예창작과, 2015년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하며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