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섭 시인 / 유령들의 저녁 식사
오렌지 향 아래 너는 집요한 내일을 들려주었다
갓 데운 얼굴이 눈 붉혔지만 너의 혀와 나의 혀는 서로 다른 위도를 간보곤 했다 항로가 궁금한 건 내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목소리였으므로 나는 버뮤다에 남겨진 이름이었으므로 상어의 지느러미를 베어 닿고자 했던 육지에서는 네가 사랑하는 향기와 나를 확인할 수 없는 시간
소문 흥건한 창밖을 의무감으로 들여다보았다 밤은 건조해지고 심해의 약속을 잊은 채 입 닦을 겨를 있었을까 검은 땅 근처 오렌지 향기가 닻을 내리는 순간 네가 내민 부드러운 목소리는 내일의 모사였을까
어떤 여자는 내 눈동자로 빚은 목걸이를 팽개치고 떠나고 다른 여자는 식탁을 둘러싼 구약을 뒤져 나의 정체를 수소문하기도 했다
낯선 식사가 무르익었다 소란하게 웃음 터진 건 핏줄 불거진 오른손이 떨기나무 속으로 사라질 무렵
웃음이 마르기 전 열쇠를 삼킨 이웃 남자는 새까만 목을 포기했고 십오층 옥상에서 신발을 벗은 아이들은 자유로운 관절을 비틀어 지상과의 충돌을 감행했다
너는 믿지 않았지만 호우경보는 만삭의 공주를 섭취하는 것보다 익숙한 풍경이었으므로 나는 피로 물든 회전문 놀라운 백발을 풀어 헤친
손 없는 혁명가 항로 밖으로 이어진 낡은 복도 끝 너는 상어 지느러미와 해저로 가라앉는 아이를 주문했다 갓 데운 얼굴이 집단 서식하는 어떤 왕국에서는 털 고운 나를 손쉽게 양념해 내가 없는 내일 어디쯤 둘러앉아 예의 바르게 시식하고는 했다
식탁에 앉아 눈 붉힌 얼굴을 탐문하는 손님들 배부른 건 그들이었으므로 나는 적란운 근처를 떠도는 이름이었으므로 오렌지 향 아래 잠들면 당신과의 풋사랑 후에 차갑게 요리되어 나는 잠들면
월간 『우리詩』 2012년 5월호 발표
이정섭 시인 / 개나리가 묻다
긴 겨울 지나 나는, 죽었을까요, 살았을까요, 겨울과 겨울 사이 잠깐 눈 붙인 여인숙에 미량의 체취, 남았을까요, 밑줄 긋던 밤 지나고, 또박또박 침 발라 헤아리던 봄날은 왔는데요, 자생하는 들꽃은 상징이라는 새빨간 거짓말, 봄볕은 사실 죄다 아스팔트에 꽂히는 걸요, 곰팡내 깊은 여인숙 담요 아래 버려두고 온 겨울은 아직 꼬물거리는데요, 이렇게 샛노란 꽃, 피워도 되는 건지, 화냥기 없는 꽃 어디 있을까요, 나는 당신의 이름을 유혹하는 리틀 미스 노 네임, 나긋나긋 물기 오른 입술이, 갖고 싶지 않나요, 깍지 낀 당신과 나의 봄날, 침 흘리는 꽃가루를 받아, 내일이면, 저기, 우직하게 자라는 어둠의 습지 긴 빙하의 품안, 활짝 열린 짐승의 미래로, 뛰어들 우리, 나른한 관성 사이로 강은 흐르고, 아무튼, 짧은 봄 지나 당신은, 살았을까요, 죽었을까요
이정섭 시인 / 발렌타인데이
오늘 밤에는 발가락을 세어볼까요 안대를 한 한낮을 걸어 도착한 지하에는 절름발이 저수지 눅눅한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면 익숙하게 몸을 감싸는 달의 백성들 가시지 않는 붓기가 거슬려서요 휘파람을 불어요 술래가 된 누나는 모두들 숨어 버린 정글의 식도를 헤매며 울고 있어요 새빨간 퓨마의 식욕이 날씬한 나이키의 이빨이 사지 늘어진 가로등의 숨통을 물고 지나가는 골목길 덜컹대는 창문 틈으로 누나는 어둑어둑한 발바닥을 자꾸 훔쳐보네요 아킬레스의 튼튼한 초콜릿을 떼어낼 면도날은 숨죽여서요 촛불을 켜요 눈깔사탕만 한 덩치를 가진 요정이 꿈속에서 말 거는 일 잦아졌어요 버성긴 꿈길마다 시럽처럼 달라붙는 고름을 털어내구요 요정의 향수로 목욕하는 일 즐거웠어요 착각일까요 울음을 업고 누나는 새 소꿉을 차렸어요 어깨끈 끊어진 종이옷이 자주 발목까지 흘러내려서요 어두운 백지에 그려진 지도를 되뇌곤 해요 산티아고 리마 부에노스아이레스 동화 속 마왕의 궁전보다 먼 서울 서울 서울 오늘 밤 발가락을 세어볼까요 초인종 없는 저수지 앞에서 나는 누나를 불러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부르튼 발가락을 하나하나 세지요 산발한 우리가 건너야 할 계단은 여전히 청춘인데요 오돌토돌한 소꿉 사이로 맨드라미의 길 되짚어 아무도 보지 못하게 아무도 듣지 못하게 휘파람을 불어요 반 지하 저수지는 곧 증발하겠죠 누나는 벌써 푹신한 안개를 덮고 잠들었어요 마왕의 궁전 부근 비탈에는 요정의 목소리 포근하구요 푸른 밤의 기척을 살펴 면도날은 꽃을 피워요 날을 세워요 요정의 침샘은 참 아늑한데요 달의 백성들마저 외면하는 오늘 밤에는 길 잃은 발가락을 세어볼까요 가늘게 떨고 있는 모가지의 흉터도 헤아릴까요 내 후각은 이미 신선한 피에 중독됐으니까요
이정섭 시인 / 론다*의 황소
우연히 들어선 나선형 계단입니다
외가닥 난간에 의지해 오르내리는 이중나선은 한밤에는 투명하고 한낮에는 먹먹합니다 누군가의 손바닥이 뺨을 스칠 때마다 눈물을 벼려서 나는 계단으로 달아난 손금을 추적합니다 족적의 향기는 투지를 불사르는 마타도르의 물레타였습니다
(던져진 선택지는 운동과 정지)
근육을 달구고 발을 굴러서 시간을 뒤흔드는 관중처럼 계단은 무모한 십자가를 끝도 없이 세웠습니다 수나사의 꼭짓점에 정좌하신 당신 꼿꼿한 허리가 너무 떳떳해 보여서요 나는 꽃잎처럼 계단을 내려갑니다 누군가의 손금이 깊게 패인 볼 닦아도 닦아도 푸른 멍은 지워지지 않습니다만 계단을 내려가는 오후의 바람은 콧노래입니다 그러고 보면 봉인된 천국의 모서리에는 언제나 바늘구멍이 있었습니다 낙타를 기다리는 사막의 태양처럼 당신, 오랫동안 콧김으로 삭힌 백골을 사랑하는군요
당신을 의심하는 내게로 당신의 의자 먼 공중 두 가닥으로 꼬인 밧줄이 천천히 다가옵니다
위로는 소용없는 기호입니다 하강하는 에너지를 또한 나는 가졌습니다 당신의 손금은 이미 잊었습니다 다만 난간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목소리 어제도 있고 오늘도 있는 먼 공중의 이중나선 자주 뒤돌아봅니다
나는 우연이니까요
* 근대 투우의 발상지.
이정섭 시인 / 히(허)스토리
눈을 뜬 채 토끼는 잠들고 잠이 든 채 일을 한다 한 발 먼저 거북이가 가속도에 올라탔다 앞서가는 시간의 볼은 도톰해지는데 왜 배고픈 걸까
전방을 향해 버스는 질주하고 부지런한 토끼는 그 자리다 그 자리가 천국이다 너무 가까워 닿을 수 없는 미궁 토끼는 믿는다 단단하게 트랙을 딛고 선 토끼는 부지런히 믿는다 소문 많은 방정식은 출구가 없다 습관처럼 콜로세움에 들어섰다
통로마다 와류가 출몰하는 미궁의 옥상 거북이가 알리바이를 먹어치운 0.1초 뒤였다 언뜻 토끼가 날았다 정지한 화살처럼 부러진 시계바늘처럼
직립한 스턴트맨의 낙하산은 펼쳐지지 않았다
*엄마젖은 친근하고 커피 향 그윽한 목신牧神의 오후*예요 러닝머신을 사랑하는 소금밭은 벌써 까맣게 잊었어요 그런데 왜, 자꾸 헛배가 부른 걸까요
* 말라르메의 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영둘 시인 /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외 4편 (0) | 2021.09.24 |
---|---|
박주하 시인 / 빗방울들 외 1편 (0) | 2021.09.24 |
홍지호 시인 / 안국역 (0) | 2021.09.24 |
유수연 시인 / 균형 외 2편 (0) | 2021.09.24 |
황인찬 시인 /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외 1편 (0) | 2021.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