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연 시인 / 균형
가방을 하나 새로 샀다
언제부터인가 척추가 뜨끔거리기 시작했다 한쪽 어깨에 무겁게 메고 다니던 가방 때문이었다 사르트르의 책이라도 한 권 넣는 날이면 내 척추는 잘못 들어선 길처럼 아득히 휘어버려 허리를 펴는 데 몇 분이나 걸릴 정도로 아프곤 했다 꼭 오른 쪽 어깨에만 가방을 메는 삶의 습관이 문제였다 허리만 아픈 것이 아니라 어깨의 관절까지 삐걱거렸다 혹, 나의 정신의 균형도 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책의 편식과 생각의 편식과 사람에 대한 편식으로 내 몸과 정신은 균형이 깨져 있는지도 모른다 머리와 어깨와 허리와 다리가 모두 삐딱하다 다시 통증이 온다 원인을 찾기 시작한다
밖으로 뛰쳐나가 양쪽 어깨에 매는 배낭 같은 가방을 산다 그리고는 서정시집도 한 권 사서 가방에 넣는다.
유수연 시인 / 자귀나무는
숲을 지나다 스친 머리 끝에 움츠러드는 무엇이 있었다 겁을 잔뜩 먹고 호흡조차 끊긴 듯한 몸짓이었다 무엇이 바람같은 머리칼에도 놀라는 것일까 올려다 보니 자귀나무잎이었다 빛이 밝게 비치기만 해도 잔뜩 몸을 움추리는 흥분파의 전도 속도는 14mm라고 한다
곤충이 날아와 앉으려다 놀라 날아가버린다 그렇게 한껏 움츠리면 세상을 조금은 비켜갈 수 있다는 걸까 덕분에 다른 나무의 잎들보다 잎을 덜 갉아 먹히기도 하지만 외로울 땐잎을 갉아 먹혀도 좋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잎을 갉아 먹히는 그 때 그와 한 몸이 되는 것일게다 가까울수록 깊은 상처를 입는 것일게다
그의 흔적인 꽃가루로 상처를 추스르는 걸까 세포들이 소란스럽다
한 동안 소란스럽던 자귀나무는 어느 새 한 계절을 지나, 홀로 분홍꽃을 산형상으로 무수히 피워 놓고 있다
유수연 시인 / 파가니니 연못
당신과의 정사는 초록 숲이 우거진 흐린 그늘이었던가요 일초에 열 두개의 감성을 신경세포의 활로 낱낱이 건드리면서 지나가시는군요 E선의 유두에 당신의 입술을 닮은 활이 스치기만 해도 나는 가늘고 긴 고음의 물결로 흩어집니다
그늘의 굴곡이 다른 음들 몇, 사랑처럼 지나갔지요 몸의 또는 영혼의 쾌락은 악마적인가 의심합니다 그래요 당신의 활이 순식간에 열두 곳 성감대를 건드려요 절정을 향해 치받는 감성의 음들을 받아먹은 잉어, 그 부레처럼 부풀고 있어요 두려워요 영혼을 악마에게 판 당신, 내 몸의 또는 영혼의 부레가 당신의 입김으로 부풀어요
터질 듯, 얇아질 대로 얇아진 투명풍선처럼 부풀어올라요 발은 이미 딛을 곳이 없어요 한순간 둥실 떠올랐으나…
* 파가니니는 바이올린으로 1초에 열두개의 음을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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