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서 시인 / 화정 목수
못 하나 헛되게 박지 않으려는 욕심과는 달리 엄지손가락이 시퍼렇게 물들었다 목수는 떨어진 못을 줍지 않는 법 못 주머니 허리에 차고 망치를 들었지만 풋내기 목수임을 나이 든 목수는 금방 안다 못 잊을 여자 찾으러 여기까지 흘러들었다 하면 깊은 상처는 아물지 않는 법 못 박힌 나무는 버리라고 한다
성냥골 모아 불지른 발바닥 상처보다 몸뚱이가 뜨겁게 찾아드는 여자 몇 해 전 서울에서 만나 내 손을 감싸주던 따뜻한 기억을 버리지 못하고 버릴 것 모르면 쓸 것도 모른다는 나이 든 목수의 말도 못 들은 척 살 속에 녹이 슨 못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목수는 고집이 있어야 한다 쓰고 버리는 것도 목수가 정한다고 나이 든 목수는 늘 말하지만 그녀가 사는 서울이 삼십분 거리라는 화정지구 야방에는 녹슨 못 하나 고집스럽게 살 속에 묻고 앓아누운 풋내기 목수가 잠을 청하고 있다
김영서 시인 / 언제였을까 사람을 앞에 세웠던 일이
아내가 출근한 뒤 두 돌 지난 막내 손잡고 외출 중이다 막내는 잡힌 손 뿌리치고 혼자 내달음친다 애를 앞세우고 어정쩡한 걸음으로 집에 돌아오면 하루해가 저문다 온종일 아이가 나를 끌고 다닌 것이다 애가 세상에 있기 전 깃발을 쫓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를 펄럭이는 깃발이 희망이었다 깃발 아래서 사람을 생각하면 분파주의자로 몰렸다 하늘을 찌르는 높기만 했던 깃발 이제 깃발은 꺾이고 바람만 남았다 철모르는 막내가 그 속을 뛰어다닌다 아버지 손을 뿌리치고 바람 헤집고 뛰노는 아이를 본다 바람 속에서 자유로운 아이를 본다
김영서 시인 / 봄
소가 울타리를 넘었다 우리에 불이 나도 꿈적 않던 것이 민들레가 날아오르자 키보다 높은 울타리를 단숨에 넘었다 작대기 들고 한참을 설치는데 마실 온 아줌마가 너무들 다그치지 마라 울타리 넘을 지경이 아니었으면 종자를 누가 받아 기르겠나 소가 울타리를 넘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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