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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영서 시인 / 화정 목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4.

김영서 시인 / 화정 목수

 

 

못 하나 헛되게 박지 않으려는 욕심과는 달리

엄지손가락이 시퍼렇게 물들었다

목수는 떨어진 못을 줍지 않는 법

못 주머니 허리에 차고 망치를 들었지만

풋내기 목수임을 나이 든 목수는 금방 안다

못 잊을 여자 찾으러 여기까지 흘러들었다 하면

깊은 상처는 아물지 않는 법

못 박힌 나무는 버리라고 한다

 

성냥골 모아 불지른 발바닥 상처보다

몸뚱이가 뜨겁게 찾아드는 여자

몇 해 전 서울에서 만나 내 손을 감싸주던

따뜻한 기억을 버리지 못하고

버릴 것 모르면 쓸 것도 모른다는

나이 든 목수의 말도 못 들은 척

살 속에 녹이 슨 못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목수는 고집이 있어야 한다

쓰고 버리는 것도 목수가 정한다고

나이 든 목수는 늘 말하지만

그녀가 사는 서울이

삼십분 거리라는 화정지구 야방에는

녹슨 못 하나

고집스럽게 살 속에 묻고 앓아누운

풋내기 목수가 잠을 청하고 있다

 

 


 

 

김영서 시인 / 언제였을까 사람을 앞에 세웠던 일이

 

 

아내가 출근한 뒤

두 돌 지난 막내 손잡고 외출 중이다

막내는 잡힌 손 뿌리치고

혼자 내달음친다

애를 앞세우고

어정쩡한 걸음으로 집에 돌아오면

하루해가 저문다

온종일 아이가 나를 끌고 다닌 것이다

애가 세상에 있기 전

깃발을 쫓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를 펄럭이는 깃발이 희망이었다

깃발 아래서 사람을 생각하면 분파주의자로 몰렸다

하늘을 찌르는 높기만 했던 깃발

이제 깃발은 꺾이고 바람만 남았다

철모르는 막내가 그 속을 뛰어다닌다

아버지 손을 뿌리치고

바람 헤집고 뛰노는 아이를 본다

바람 속에서 자유로운 아이를 본다

 

 


 

 

김영서 시인 / 봄

 

 

소가 울타리를 넘었다

우리에 불이 나도 꿈적 않던 것이

민들레가 날아오르자

키보다 높은 울타리를 단숨에 넘었다

작대기 들고 한참을 설치는데

마실 온 아줌마가

너무들 다그치지 마라

울타리 넘을 지경이 아니었으면

종자를 누가 받아 기르겠나

소가 울타리를 넘는 봄

 

 


 

김영서 시인

1964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 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5년 《시로 여는 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언제였을까 사람을 앞에 세웠던 일이』와 『그늘을 베고 눕다』『우리는 새로 만난 사이가 되었다』가 있음. 제1회 푸른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