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둘 시인 /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젖은 잠을 수평선에 내거니 새벽이다 밤사이 천둥과 함께 많은 비가 내렸다 예고된 일기였으나 어둠이 귀를 키워 여름밤이 죄처럼 길었다 생각 한쪽을 무너뜨리는 천둥과 간단없는 빗소리에 섬처럼 엎드려 나를 낭비했다
지난봄, 바다로부터 해고통지서가 날아왔다 세상은 문득 낯설어졌고 파도는 사소한 바람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코발트블루 바다는 손잡이 없는 창窓, 절망보다 깊고 찬란했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나의 슬픔도 그토록 찬란했을까 나는 구름 뒤에 숨어 낮달처럼 낡아갔다 들판의 푸른 화음에 겹눈을 빼앗긴 나비를 기다리며 나는 오지 않는 희망에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바다가 깨어난다 졸려도 감을 수 없는 희망 돌아서는 파도의 옷자락을 따라가면 거룩한 경배처럼 엎드린 섬들 나는 존엄을 다해 아침 바다의 무늬를 섬긴다 희망이란 소소한 풀잎이거나 날 비린내 풍기는 고깃배의 지느러미 같은 것 풀잎도 계단도 허리까지 젖어 궁리가 깊다 밤새운 탕진에도 하늘이 남아 드문드문한 구름 송이들은 젖은 마음을 문지르는 데 요긴하겠다 마루 끝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담장 아래 칸나의 방에 볕이 붉게 들고 거미는 방을 훔치는 수고를 덜겠다 느슨하던 수평선도 다시 팽팽해져 나비를 부르고 고깃배 한 척 안개를 젖히며 희망처럼 돌아오고 있다
-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허영둘 시인 / 개구리 울음소리
이것은 한 마지기 꽃밭이다 이 꽃들은 허공에서 핀다 가지런히, 아니 산만하게 한 음조씩 다른 빛깔로 핀다 꽃은 피면서 자신의 생을 모두 뱉어낸다 꽃 피는 소리에 달빛이 노랗게 익는다 꽃은 향기와 함께 한 계절을 다 떠메고 갈 기세다 허공이 치밀해지고 살갗이 따갑도록 향기가 달려든다 나는 꽃을 피해 봄밤을 닫는다 꽃은 바람이 되어 밤을 잘게 부순다 냄비처럼 꽃은 피면서 자신의 생을 물속에 넣고 삶는다 꽃이 핀다 와글와글 너의 옛날도 한 마지기 두 마지기 조개껍데기처럼
<신춘문예 당선 시집> 2012년 문학세계사
허영둘 시인 / 토독
상추를 씻으려는데 토독 제 존재를 온 몸으로 알리는 끊어질 듯 단단한 목숨의 신호 토독을 손바닥이 면저 읽는다
소파에서 졸고 있던 남편이 벌떡 일어나 달려온다 도망가라고 상추 화분을 그리 흔들었는데 굼뜬 녀석인가
두 손으로 둥글게 품고 옥상 상추밭으로 올라간다
개미만한 방아깨비에게 저 계단은 봄부터 가을까지 푸른 한 생의 거리
토독 토독 그래 그래 알았어 허허 우주의 먼지만한 한 귀퉁이 일순환 한다.
허영둘 시인 / 분홍 달
바다 위에 분홍달 떴어요 영랑 생가 대숲 아래 툭툭 붉던 동백 그 발자국 쓸어안고 그렁그렁 붉어요 오늘밤 마량항에 걸린 달은 동백꽃 무덤 바다를 마시고 활활 취한 시인들이 어둠 속 다비식을 지켜보네요
목숨진 꽃들 밤이 되면 하늘로 간답니다 도시를 떠나올수록 별이 왜 많은지 여름밤 산속에 절정으로 쏟아지던 별이 풀꽃들 낱낱의 발자국인 줄도 이제는 알겠네요
저 분홍달 잦아든 자리에 영롱한 사리들 남을 거예요 저 별들 모두 꽃의 뼈인거죠.
허영둘 시인 / 춤추는 소나무
길을 잃고' 잃은 길 위에서 문득 만났네
산을 내려온 안개가 길을 막으니 갈 수 없는 길은 스릇' 나를 풀어주었네 새벽에 길을 잃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어서 남은 해를 가늠하며 여백 속으로 걸어갔지
푸르게 흔들리던 보리밭은 안개에 묻히고 4월 안개에서는 사막의 냄새가 났어 나는 방랑을 기꺼워하는 사막의 여행자 이 몽환은 해 뜨면 사라질 신기루 아닌가
어디선가 성성한 바람이 불어왔어 검푸른 구름머리 이룬 소나무들이 안개로 부풀어 오른 언덕을 유령처럼 떠다니고 있었네
보랏빛 감도는 소나무 숲에 드니 둥둥둥 환청 같은 북소리 들리고 멈춘 듯 역동적인 군무 모였다 흩어지며 노송의 허리 휘감는 안개는 흡사 죄인의 숨결 세월을 업은 채 온 몸으로 비트는 춤사위는 하늘 향한 어느 영혼의 곡진한 언어였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계헌 시인 / 자판기 외 2편 (0) | 2021.09.24 |
---|---|
함순례 시인 / 돌밭에 절하다 외 2편 (0) | 2021.09.24 |
박주하 시인 / 빗방울들 외 1편 (0) | 2021.09.24 |
이정섭 시인 / 유령들의 저녁 식사 외 4편 (0) | 2021.09.24 |
홍지호 시인 / 안국역 (0) | 2021.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