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하 시인 / 빗방울들
더 멀리 가봅시다 가장 멀리 가는 길을 알고 있는 것처럼 멀리 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각자 자기소개는 하지 맙시다 완벽한 하나의 사건처럼 순식간에 불거졌다가 사라집시다 시간이란 슬픈 눈망울을 버리고 흘러내리는 것은 목숨을 만져보는 일 전생에서도 잊지 못한 미소를 생각하며 최대한 멀리 뛰어내려 봅시다 서로의 어깨를 부축하지도 말고 젖을수록 단단해지는 돌멩이처럼 이 밤을 훌쩍 넘어갑시다 거짓말을 들은 기색 없이 서로의 눈물만 들고 바닥으로 달아납시다 바닥은 힘이 없으니 장렬하게 무너집시다 불빛이 비에 젖어 번지는 저 길바닥의 무늬 속으로 사라집시다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걷는사람, 2021) 중에서
박주하 시인 / 줄에 관한 생각
거문고에 줄이 없었다면 누가 줄을 튕겨 심연을 건드려 보았을까
어미가 줄을 놓아주었으니 새끼도 그 줄을 타고 지상에 발을 들였겠지
탯줄을 감고 노래 부르고 탯줄을 타고 춤을 추고 한 올 한 올 서로를 튕겨주는 믿음으로 즐거웠으나
약속에 매달리고 관계에 매달리고
그 줄 점점 얇아지고 가늘어졌으니 돌아갈 길이 멀고도 아득하여라
몸으로 엮었던 줄을 마음이 지워버렸네
서로에게 낡고 희미해져 먼지처럼 가늘어진 사람들
요양원의 투명한 링거줄에 매달려있네 잃어버린 첫 줄을 생각하네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걷는사람, 202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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