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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함순례 시인 / 돌밭에 절하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4.

함순례 시인 / 돌밭에 절하다

 

 

아버지를 묻은 이곳은 돌밭이었다 오이 딸기 주렁주렁 열리던 감자꽃 쇠뜨기 바랭이 돌날에 찔려 징징거리는 날 이끌고 심으신 감나무 일천만사 아버지의 속울음 같은 구름 뭉실뭉실 흘러간다

 

아셨을까

아버지, 알아채신 걸까

안아 올려 감나무 아래 세워 놓으신다

붉은 홍시 떨구어 주신다

 

살아 생전 척박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한 바닥 밭 고스란히 내게로 넘어왔을 때 뼈아프게 주워드는, 고랑 속! 돌소리 자글자글하다

 

 


 

 

함순례 시인 / 마흔, 잘 오셨다

 

 

산허리에 구름이 몰려있다

이론적 근거야 알 수 없지만

내가 가고 있으니 구름이 오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빗속에서 바라보는 구름은

고등어 등처럼 푸릇했으나 파닥거리지 않는다

추녀에 매달려 울던 빗방울로

낯을 씻으며 묘하게 마음 편안하다

오늘 아침 핏발 가시지 않은 눈을 닦다가

수채로 흘러든 세숫비누 조각

향기 잃고 몸 가벼워진 자화상인 듯

울컥, 했다

세면유리에 눈물 얼룩진다

바싹 다가와 앞가슴 들이미는

흰 뼈들, 저 구름 속엔

세력 형형한 수많은 손금들이 산다

사십 년 내 몸뚱이 숨겨준

고마운 골목길이 사신다

 

 


 

 

함순례 시인 / 생(生)

 

 

분주한 일에 쓸리다 보면

마음이 뻘처럼 눕는다

안으로 목 메어오는 적 있다, 더러는

화장실로 달려가

왈칵 눈물 쏟곤 하는데

야윈 눈발이 다년간 어느 한 날

나를 앞지른 이 있었다

어금니 꽉 깨물었지만

공중화장실 음습한 냄새

어둡고 긴 터널 빠져나오는 소리

바닥을 차고 올라 내 아랫도리 적시었다

겁 없는 생이 어디 있으랴

누군가의 눈물로 크는 것이

이 땅의 이데올로기임을

옆 칸 통곡소리 끌어덮으며

말라버린 눈물자국을 보고서야 알았다

 

 

함순례 시인

1966년 충북 보은에서 출생.  1993년 《시와 사회》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뜨거운 발』(애지, 2006), 세 번째 시집『나는 당신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가 있음. 2005년 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아름다운 작가상'(18회). 현재 '작은詩앗 채송화'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전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