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혜 시인 / 저녁에 오는 사물들
오른팔의 어둠이 오고 왼팔의 빛은 택시를 타고 갔어
이후 반복되는 망각의 경험들 유리 썬팅 필름 가운데 식탁으로 모이기 시작해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이 접히는 세계 척추로 미끄러지다 부서지는 소소한 기척을 피로 봉합하기
한지혜 시인 / 수습사원
노랑머리로는 수습이 안되는군요 방금 물들여서 낯설죠 내가 더 밝게 빛나려면 어두워야 하나요 당신의 검정으로 물을 들이면 낮이 밤으로 가서 당신의 밤에 묻히면 머리카락 사이사이 내 별을 쉽게 찾겠죠 별들이 흘러요 당신의 밤은 더 어두워 비로 내려요 나는 한 손을 든 표적 당신의 우산 밑 얼룩으로 더 검어질게요 당신들의 안을 기웃거릴 때 담장이 생겨요 당신의 가시 안으로 들어갈수록 울타리는 가까워지고 달이 담장 위를 비추어요 밤의 길이가 담장 안처럼 길어지는 동지 달의 옆에는 늘 별 나는 물통과 화장품이 든 가방을 수시로 챙겨요 빛깔은 검정 무거워 보이지 않죠
한지혜 시인 / 시의 마사지
너의 손가락은 내 얼굴에서 가끔 처분거렸다 첫 번째 찻잔이 왼쪽에 놓여도 괜찮은데 남자는 단숨에 알로에 그릇을 비웠고 남자는 시의 가락을 읽다가 익은 국수 위에 푸른 야채와 양념을 올리고 김으로 말아 먹어버렸다 숲으로 들어간 남자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화병을 세우고 물을 담아 놓는다 백합 나리 목련 해바라기 후리지아 체리세이지 얼굴 세밀히 자라나게 마이크로코메도를 열고 집게로 뽑아내는 남자는 시큼함 벨벳은 젖어 있고 끓는 각질처럼 꽂혀 있던 남자
묻은 얼룩에 먼지 채워지던 강의실에서 백지가 생각났지만 모델링을 해야 하는 남자는 지우개가 없다 너는 구연산이 녹는 구멍에 유연액을 넣고 돌린다 흘린 물을 닦는다 바람 한 톨 젖지않게 빨대와 물병들이 물에서 잠시 쉴텐데 마른 젓가락이 물병에 꽂혀 시가 된다면 좋았을 마른 것이 젖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남자는 집으로 돌아가고 없다 내 모니터에서는 새로운 강의가 시작돼
한지혜 시인 / 위브의 방
한 번은 궁금했을까요 생각은 많이 났었죠 알레르기처럼 어긋난 등뼈의 양쪽을 누르세요 한순간만 아프게 자꾸 못해준 기억만 비염이 생각나요 비울까요 등뼈의 살을 빼세요 나는 시리얼과 프링글스 택배 상자를 버린다 창밖 실외기처럼 쭉 건너면 새의 집이 있다 실외기에서 나와 외출하는 새 남자는 빌딩의 창문을 열고 나와요 담장 위에서 새처럼 어름을 탄다 날아든 새의 잎이 붉어진다 요거트와 꿀이 섞인 복분자처럼 달콤한 침으로 붉어질까요 구름처럼 핏줄이 흐른다 누울까요 방을 열어놓으세요 자다 일어난 나무가 내일 아침을 나는 라텍스를 떠올린다 아침밥으로 마무리 한 준비가 되어 있어요 몇 가지 반찬으로 나는 면역이 생겨요 오늘은 다행인가요 내가 먼저 연락을 지웠다 너는 말로만 어떻게 지내는지 이틀 전 연락이 왔다 헤어지자 한 건 너였는데 만나면 좀 그래요
한지혜 시인 / 기억의 온도
나는 죽었던 너의 기억 아래 눈마저 내리는 오랜 표면은 어둠 너의 발 밑 나의 표면은 너의 두터움 나는 얼음과 부딪던 하얀 살갗 밖은 눈이 오며 시야가 가려진다 나는 창에서 어둠을 보고 있다
두 손을 꼭 잡고 걸었던 거 기억 나 어제 그런 일 있었으니까 먹으라고 샀어 달콤한 걸로 몸이 감지기였던 거 알아
물속이라는 나의 기억도 너의 생각 주먹을 펴 닿는 세상이 있다 물의 파동을 느끼는 나는 어름 아래 산다 감아 눕힌 테이프를 일으켜 말의 조각을 줍는 너의 시각으로 네가 끼어들어와 문을 열어 준 포근한 세상 나는 공간보다 입체를 알게 되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해리 시인 / 시작 연습(詩作鍊習) 외 5편 (0) | 2021.09.25 |
---|---|
황인찬 시인 / 이미지 사진 외 2편 (0) | 2021.09.25 |
송계헌 시인 / 자판기 외 2편 (0) | 2021.09.24 |
함순례 시인 / 돌밭에 절하다 외 2편 (0) | 2021.09.24 |
허영둘 시인 /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외 4편 (0) | 2021.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