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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해리 시인 / 시작 연습(詩作鍊習)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5.

홍해리 시인 / 시작 연습(詩作鍊習)

 

 

엊저녁 난바다로 무작정 출항한

나의 백지선白紙船 해리호海里號

거친 물결을 밀고 나아갔다

 

오늘 꼭두새벽

빈배로 귀항했다

 

물고기 한 마리

구경도 못한 채

 

험란한 바다에서 흔들리다

파도와 달빛만 가득 싣고

 

축 처진 백기를 들고 투항하듯

쓸쓸한 귀항

나의 배는 허공 만선이었다.

 

 


 

 

홍해리 시인 / 詩를 찾아서

 

 

일보 일배

한평생

부처는 없고

연꽃 속

그림자 어른 거릴뿐.

 

풍경소리

천릿길

오르고 올라

절 마당 닿았는가

보이지 않네.

 

 


 

 

홍해리 시인 / 명창정궤

 

 

살기 위하여

잘 살기 위하여 쓰지 말고,

 

죽기 위해

잘 죽기 위해,

 

쓰고, 또

써라.

 

한 편 속의 한평생, 인생이란 한 권의 시집을!

 

 


 

 

홍해리 시인 / 정곡론(正鵠論)

 

 

보은 회인에서 칼을 가는

앞못보는 사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일을 하는지요

귀로 보지요

날이 서는 걸 손으로 보지요

그렇다

눈이보고 귀로 듣는 게 전부가 아니다

천천히 걸어가면

보이지 않던 것

언제부턴가 슬몃 보이기 시작하고

못 듣던 것도 들린다

눈 감고 있어도 귀로 보고

귀 막고 있어도 손이 보는 것

굳이 시론詩論을 들먹일 필요도 없는

빼어난 시안詩眼이다

잘 벼려진 칼날이 번쩍이고 있다.

 

 


 

 

홍해리 시인 / 시안(詩眼)

 

 

한 권의 시집을 세우는 것은

시집 속 수십 편의 시가 아니라

한 편의 빼어난 시다.

 

한 편의 시를 살리는 것은,

바로,

반짝이는 시의 눈이다.

 

스스로

빛나는

시의 눈빛!

 

그 눈을 씻기 위해

시인은 새벽마다

한 대접의 정화수를 긷는다.

 

 


 

 

홍해리 시인 / 꿈

 

 

하늘을 안고

땅을 업고

무한 공간 속을 날아가고 있었다

 

날아도 날아도 제자리였다

 

겨울이었다

 

꽁꽁얼어붙은세상에서시인이라는

수인명패를달고있는사람들이비명을

치고있었다바락바락발악을하고있었다

모두가꿈을꾸고있는지도모르고있었다

 

날개가 너무 무거웠다.

 

 


 

홍해리(洪海里, 1942년) 시인

충북 청주에서 출생. 고려대 영문과 졸업(1964년). 1969년 시집 『투망도(投網圖)』를 내어 등단함. *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 월간《우리詩》의 대표로 활동. 시집 『투망도投網圖』 『화사기花史記』 『무교동(武橋洞)』 『우리 들의 말』 『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 『대추꽃 초록 빛』 『청별(淸別)』 『은자의 북』 『난초밭 일궈 놓고』 『투명 한 슬픔』 『애란(愛蘭)』 『봄, 벼락치다』 『푸른 느낌표!』 『황금감옥』 『비밀』 『독종(毒種)』 『금강초롱』 『치매행(致梅行)』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매화에 이르는 길』 과 3인 시집 (김석규 · 이영걸 · 홍해리) 『산상영음(山上詠吟)』 『바다에 뜨는 해』 원단기행(元旦記行) 이 있고, 시선집 『洪海里 詩選』 『비타민 詩』 『시인이여 詩人이여』 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