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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영둘 시인 / 엉겅퀴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5.

허영둘 시인 / 엉겅퀴

 

 

   매혹을 생각한다

   끈적하게 엉겨 붙는 쓸쓸함 혹은

   영감靈感 어린 화가의 붓

   빛깔로 보면 몽상가의 다락방 같고

   폭죽처럼 부푸는 상상은

   목청 다해 부르던 그녀의 노래

   나는 붉고 달콤하던 여름의 상처를 떠올린다

   빛 되어 사라진 소멸의 입술들

   지극한 상실을 생각한다

   하늘의 하늘로 음파가 번진다

   자홍빛 눈물로 구름을 유혹한다

   허공이 고요히 흔들리고

   천 갈래 향기가 피어 사랑은 아득하다

   무성한 계절은 그늘이 짙어

   향기가 환히 드러나는 법

   나에게 가까이 오진 마세요

   이곳에선 이슬도 발톱을 세운답니다

 

 


 

 

허영둘 시인 / 낡은 바퀴가 있는 오후

 

 

담 아래 멈춰 선 접시꽃 두 송이

저 바퀴는 또다시 꽃 피울 수 있을까

 

나는 잘못 배달된 3월 눈송이로 창을 꾸미고

아침의 사과 같은 휴식을 좋아해요

달빛을 만돌린처럼 튕기는 풀벌레의 작은 손과

지구를 묶으며 사라지는 기적소리에 골몰하지요

가끔 마른 바람 채찍 삼아 사막을 내달리고

숲의 정수리에 참빗을 꽂아 머리를 손질해요

숲 속에는 헝클어진 영혼들이 칡넝쿨처럼 자라지요

휘파람 소리 내는 정오의 바다를 지날 때

오래전 익사한 구름을 생각하지만

허공 속으로 사다리를 세우진 않아요

이 도시에서는 무소의 뿔처럼 용맹정진하지요

누군가 내 거처를 물어오면 지상을 통과하는 구름의 은유와

쉽사리 해독되지 않는 강물의 파랑을 보여줄 거예요

 

그는 관성의 힘으로 달려온 수레바퀴

멈추지 않는 길은 속도를 만나 벼랑이 되고

바람은 습관을 조금씩 녹슬게 하네요

완고한 햇빛도 생각을 더디게 하지요

길에 짓밟힌 질경이가 개체 수를 늘리는 동안

끓어오르는 지열에 하오가 흘러내려요

밟고 온 페달은 전화기 속 잡음처럼 목이 쉬었네요

 

만찬 끝낸 저 접시는 이제 더 이상 향기를 만들지 못하나요

적막을 베어 문 그늘에 사선의 바퀴살만 흥건해요

 

 


 

 

허영둘 시인 / 입춘(立春)

 

 

   동면의 벌레들이 서로 기대어 보리뿌리점을 치며 꿈꾸는 사이 호수는 엎드린 채 겨울을 난다 발치에 선 상수리 가지가 투둑투둑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 미동도 없다 숲이 거북이걸음으로 추위를 지나는 동안 호수는 갑골동물처럼 단단해진다 바람이 칼끝을 대 여기저기 균열이 보인다 단단하다는 말을 깊이 들여다보니 맑고 투명한 속을 가졌다 어미가 자식을 안을 때의 마음 멈추지 않는 물결을 품고 있다 안간힘이 보인다 저 안간힘으로 굶주린 겨울에 한 켜씩 살을 내주고 갑골의 등을 얹었으리라 따각따각 등을 깎는 바람과 몸을 던져오는 뭉치 눈에 찰랑거리는 살도 아낌없이 주었으리라 딱딱하게 굳은 등을 구름이 쓰다듬고 쑥새가 토닥인다 샛별이 글썽 다녀간다 수초 속에 산란을 시작할 별과 헤살 지을 어린 것들 생각에 해산 앞둔 어미처럼 설레는 호수, 돌아온 봄이 등피를 살살 벗기면 겹겹의 물결로 만개할,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불은 젖을 물리며 호수는 봄밤처럼 그윽하겠다

 

 


 

 

허영둘 시인 / 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에 들어가 보니

 

 

   처마 끝에 달 기울어 물속처럼 밤이 깊다

   이따금 물방울 튀기듯 풀벌레 우니

   석류 익는 담장 너머로 파문이 청량하다

   담 모퉁이는 비밀을 키우기 좋은 장소

   초롱불을 들었으나 갸륵한 불빛은

   두 사람의 밀회를 전부 들추지 않는다

   지상은 혼곤한 잠 속에 들고 먼 하늘에 별들 아련한데

   스치듯 비껴가는 여인과 나의 눈길

   먼지 낀 세월 사이로 별이 쏟아진다

   물빛 쓰개치마 쓰다듬던 달빛이

   여인의 눈꼬리 근처에서 교태를 더하니

   사내의 도포 자락이 바람도 없이 흔들린다

   묶어 올린 치마폭은 연심으로 부풀고

   보얀 속곳과 오이씨 버선 위에서

   화원의 은밀한 떨림도 만난다

   밤은 애틋하게 익어가고

   연정은 어스름 달빛에 녹아

   사위가 몽롱하다

 

 


 

허영둘 시인

1956년 경남 고성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