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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인식 시인 / 엿장수 원효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5.

전인식 시인 / 엿장수 원효

 

 

골목길에서 한 사내 떠들어 댓네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한 나

빈병과 헌책, 고장난 선풍기를 들고 나갔네

그 사내 보이질 않고

사금파리 하나에 골목길이 환하였네

 

멀리 내 사는 마을까지 찾아와

고래 고래 외쳐던 까닭 몰라

텔레비젼 보는 온종일이 허전하였네

 

혹, 그가 찾아다닌 것이

못 쓰는 물건들이 아니라 어디에도 쓸모없는

내 마음은 아니었을까

프로야구 중계방송이 끝난 저물녘에서야

간신히 생각 하나 건져 올렸네

 

고장난 마음은 생각지도 못하고

못 쓰는 물건들만 들고 뛰어나갔던 어리석음들이

한꺼번에 노을 빛으로 몰려들었네

가슴팍에서는 씁쓸함들이 박수를 쳐대는 소리

비웃는 소리 들리는 듯하였네

 

눈 베일 뻔했던 사금파리 하나가

세상 환히 밝히는 태양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컴컴한 어둠 속으로 날 감금시켰네

 

가위소리 끊어지지 않던 그날 밤

검은 하늘에 뜨는 검은 해를 보았네

 

 


 

 

전인식 시인 / 독락당(獨樂堂)*

 

 

슬픔과 마찬가지로 기쁨도

홀로 지니고 즐길 수 밖에 없는 견고한 돌같은 것일까

무슨 힌트라도 얻을 생각에 해 짧은 동짓달 느지막이

마음 한 켠에 홀로 즐길 독락당(獨樂堂)을 찾아 나선다

넓어 쓸쓸한 안강뜰 지나 옥산리 들어설 때부터

이상하게도 바람은 나를 계곡 밖으로 밀어내기만 하고

단편의 지식 외며 살아온 몸이 고무풍선으로 날리기만 한다

되돌아가지 않으려 몇 번씩 마음에 돌덩이를 얹어가며

겨우 오래된 집 대문 앞에 섰을 때

나 보다 먼저 와있는 산 그림자가 눈앞의 풍경들을 지우고 있다

묵은 나뭇가지에 모여 사는 바람들 낯선 나를 내려다보며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웅얼거리기만 하고

기다려도 열리지 않는 문은 어두울수록 더 단단히 빗장을 지르며

안으로 고요들을 거둬들이고 있는 적막 속에

소리 내며 움직이는 것은 불한당인 나뿐이다

얼음장 밑 흐르는 물소리 듣기 좋게 계곡 쪽으로 나있는

홀로 세상 즐긴 자의 창엔 언제쯤 촛불이 켜질까

한 발짝도 들어설 수 없는 독락당에 와서

마음 구석에 짓고자 했던 독락당을 허문다

가지지 못할 정신의 허영들이 빠져나가는 밤하늘에

언제 왔을까 반짝이는 맑은 별빛 하나

그대 시퍼런 눈빛으로 빛난다

 

*경주시 안강읍 소재, 회재 이언적이 낙향하여 지은 정자

 

 


 

 

전인식 시인 / 경주 남산

 

 

누가 나를 낳았는지

누가 나를 키웠는지

 

경주 남산 칠불암이나 삼화령쯤 올랐을 때

솔바람 한줄기 쏴아 하고 내 몸을 지나갔을 때

다람쥐 한 마리가 길 가로막고 섰을 때

그 때 쯤이면 알 수 있네

 

밥은 먹었나

 

할매소리 같기도 하고

엄마소리 같기도 해서

절래절래 고개 흔들다 보면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다 보면

뵐듯 말듯 바윗속에

사람들이 있네

마을이 있네

 

경주 남산

그리운 사람들은 다 여기 있네

 

 


 

 

전인식 시인 / 삼국유사1 -효녀 지은*

 

 

누가 봄꽃 아름답다고만 할 것인가

경주 분황사 동쪽

지은이 살던 마을로 가보아라

쑥 뜯고 냉이 달래 캐느라 몸이 모자라던

무릇 들꽃 피어도 미안한 듯 고개 들지 못하고

아예 필 생각을 잊었던 진달래

 

품 팔러 징검다리 건너갈 때

흔들리던 야윈 종아리

바람이 앞에서 안아주고 뒤에서 받쳐주고

흰 보따리 여윈 달 이마에 이고

하루 품삯 보리쌀 몇 줌 치마폭에 담아 오면

별빛에도 내려앉을 단칸초가

눈 먼 팔순 홀어머니

'어제 끼니는 맛은 없어도 속은 편하던데

오늘 밥은 왜 이리도 속을 찌르는 것 같노,

 

울었다

싸리울타리 빠져 나온 바람에

서라벌 숲들이 한 몸짓으로 흔들리었다

토끼 노루 젖은 눈 비비느라 서걱거리는 숲머리

못다 운 울음은 산꼭대기 여우가 밤마다 울고

이 사실 몰랐던 귀뚜라미

가을에서야 서럽게 칭칭대던 것을

 

뒤늦은 슬픔에 눈 감아 보아도

이제 가난은 눈물을 주지 못하는

감동 없는 진부한 드라마의 소재가 되고

한 푼 동정도 받지 못할 부끄럼이 되었는가

가난하여도 남루한 의상을 걸치지 않는

화려한 네온의 거리를 빈 들판인 듯 서성이는 사거리

 

넓어 쓸쓸한 보문뜰 어슴푸레 아지랑이속

보리이삭 줍고 있는 허리만치 머리 닿아 내린 가시내

빈 바구니 가득 이삭 채워주고

몰래 살짝 찔레꽃 한 아름 담아주고 싶어라

해질 무렵에는 명활산 솔깔비** 한 바지게 지고 와서

엉덩이 빨갛게 아랫목 데워주고 싶어라

 

가시내야

서른 둘 시집 못 간 가시내야

짧은 봄 하루만이라도

알천개울 맑은 물에 때 낀 손톱 담아 두고서

찔레꽃 향기나 한번 맡아 보렴

세상에는 꽃도 핀다는 것을

 

*삼국사기 제 48권 열전 제8

**솔가리(말라서 땅에 떨어진 솔잎)의 경상도 방언

 

 


 

 

전인식 시인 / 이를테면, 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로 늙는다

 

 

이를테면, 나는 돈오돈수로 늙는다

 

불어오는 바람에 천천히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일년에 한 두번, 그것도

꽃이 필 때와 질 때의 불과 며칠사이

나는 일년치를 한꺼번에 늙는다

 

피와 살이 강물처럼 빠져나가고

어디론가 뒤따라간 마음 또한 돌아오지 않는

들불이 지나간듯 허허로운 가슴기슭에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발이 날리며

한순간 사계절이 일순할 때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미워하는 일도

하늘 날아 오를듯 날개짓 하는 열망들과

물속으로 가라앉는 돌같은 체념들도

다 이맘때 일어나는 일

 

뜨겁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불과 며칠사이 나는 늙는다

선명한 나이테 무늬를 그리며

단박에 늙는다

 

이를테면, 나는 돈오돈수로 늙는다

 

 


 

전인식(全仁植) 시인

1964년 경주 출생.1995년 선사문학상 시 당선. 1995년 신라문학 시부문 대상. 1996년 선사문학상 시 당선. 1996년 통일문학상공모 시부문 대상. 1997년 《대구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1998년 불교문예 신인상 수상. 현재 불교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