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율 시인 / 브람 스토커의 활주로 -지루한 편집室
폐쇄되지 않는 저 공항은 오래전 새들이 장악한 지도에 없는 섬
왈라키아*행 마지막 이륙이 누군가 자꾸 되살아나고 있는 당신 등 뒤에서 사라졌다 결빙을 긁고 간 마찰은 애인의 부리가 처음 닿은 귓불처럼 타올랐다
파랗게 탄 구름의 입자 날것들의 교성이 반죽된 극한 음습한 해후,
회항하려는 새들이 기우뚱 몸 낮출 때 죽은 새 그림자로 날아가 말간 달을 그릴 뿐 미래의 우리가 지시할 붉은 등은 모르는 착륙 유도 신호는 늘 드라큘라 푸른 눈빛이다
못 박힌 전설을 파내 또 다른 문장으로 가둔 절필 100년 동물적 독창獨創 브람 스토커도 루시**의 파리한 목덜미에 감전되었을 터, (그의 흡혈 저서는 끝없이 알을 슬고 부화한다)
후각을 연 채 비웃한 연대를 지나며 수십 번 발가벗겨진 루시,
시간을 엎지른 낡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낯선 손 하나 솟아 흐려진 눈빛을 재생하는 3D 컬러렌즈 착용한 특별한 편집
흡흡, 유도등 빛 선명한 결빙의 활주로는 널브러진 루시의 파편, 붉은 셔벗을 흡입하는 소리로 선연하다
지하로 기우는 자막의 깃털을 당겨 달빛에 젖히던 목 급히 가렸었나, 내 숨골을 더듬으며 죽은 심야영화, 원작으로 되감기는 꼬리들 패러디의 오류들이 충돌한다
신선한 루시의 체취를 천천히 핥는 활주로 위 나는 루시 알레르기 중증 소유자,
오늘, 지루한 루시의 분열을 살해하고 누군가의 차가운 등에 업혀 트와일라잇*** 으로 가고 있는
* 루마니아 남부의 역사적인 지방명 ** 소설 드랴큘라 속 인물 *** 땅거미가 내리는 시간 또는 희미하게 날이 밝아 올 무렵.
ㅡ 등단작
이하율 시인 / 비대한 악장과 모라꼿 주의보
-악기를 받치던 해 지난 신문 오늘의 날씨에 은둔하다 꼬깃꼬깃 버려진 나는 그때 태풍의 눈이었다
공명의 입자를 흡수하던 하늘과 이물질로 앓던 대지가 조율을 시작하자 열대폭풍 모라꼿이 열광하듯 피어나요 어느 나라에선 에메랄드 이름을 팔아 활을 사기도 하죠 느닷없이 난타의 악사들이 줄지어 구름 무대에 오르네요 땅의 객석이 외면하며 수런거리자 그들의 손가락이 눅눅한 경고에 척척 휘감겨요
물갈퀴 사이로 죽죽 물결을 펴 널어요 바람 고무래가 지나간 자리, 물의 현을 튕기며 뛰어노는 자유 핑거링, 태풍에 맞춘 거대한 키가 치명적 세기라고 우겨요 떼떼 흔들흔들 춤 춰요 하늘은 물을 켜고 우린 모라꼿에서 이렇게 살아요 발목을 푹푹 심으며 지나던 진창에 모라꼿이 마구 피고 있다는 전갈도 뚝 끊기고 이제 심오한 씨앗 한 점 묻으며 달라이 라마를 기다려요
현을 켜요 향기로운 소나무 숲을 달리다 촘촘한 단풍나무 숲 끝에서 숨 멈추고 젖은 나무의 살을 저미듯 물바다를 켜요 바닷물이 달궈진 염전에 푸른빛으로 스며들 듯 누구라도 가벼운 입술은 닫고 와 태양혈이라도 지긋이 눌러줘요 죽은 모라꼿, 악기의 목과 몸통들이 다 흩어져도 낮은 브리지에 걸린 현을 켜려는 건 이미 젖은 대지를 비오티의 활로 긁어내는 막연한 연주
비대한 악장이 넘실넘실 넘보네요 대지에 음표를 그린 이들이 노래를 부르면 나는 낡은 악보 속으로 숨을 테지요 그러나 주의보를 외면하는 당신이 여전히 난타로 시작하는 아침이라면 모라꼿으로 활짝 피겠습니다
ㅡ 등단작
이하율 시인 / 해의 지문이 손등에 필 때
공터에 이는 작은 불길 바라보는 손끝이 오그라든다 노인과 민들레가 해의 지문을 피우는 시간 낙하한 지문을 태우며 오그리는 저 화장의 연습은 사랑채를 전소시킨 소년기의 불장난이 발화점이었는지 모른다 수십 년 똬리 튼 무형의 시달림 부식된 공터에는 흉터라는 간극이 살고 있었다 숨어 날름대던 불꽃이 흩어지고 시야는 불의 마법에 걸린 시간의 사체로 자욱하다 화상 입은 손등을 들여다본다 미로처럼 접힌 주름을 당기자, 잡힐 듯 흥건한 기억이 공터 불탄 자리로 고인다 왼손의 구덩이를 오른손으로 가린 채 아물어가던 물집의 시간 부레 없는 물고기라도 사육하던 것인가 마른 젖을 할퀴던 기형의 아가미 물린 그의 가파른 등이 노을빛에 타들어간다 부싯돌의 마술이 펼친 불꽃 재로 메운 구덩이 화염을 가둬 기르던 불안의 물집을 터트린다 해의 지문이 손등을 핥으며 피는 저녁, 길 끝에 엎드린 후미진 흙의 등 흩어진 발자국 위에 또 다른 민들레가 기대고 눕는다
이하율 시인 / 꽃의 장례식
화병 든 어머니 분꽃 씨앗들과 휘청 하늘다리 건너간, 채 여물지 못한 시간을 들여다본다
방울 무당이 악귀를 밀어 넣은 병을 틀어막자 실신하던 어머니, 몹쓸 병은 낫지 않아 새벽 사립문 소리에 귀를 세웠다 외할머니는 여우가 화단에 불을 지른 후 생긴 병이라 했다
뒤꼍을 울리던 물소리가 멎고 달빛이 분꽃 씨 댓돌에 깨는 소리만 톡톡, 분바른 뱀이 밤새 창호지를 핥자 푸른 새벽, 토방 위 아버지의 구두가 사립문을 밀쳤다
해 기울 때 어머니의 귀갓길은 무거운 가방에 감긴 나선형
시린 삭신을 주무르는 고사리 손아귀가 한증막 보다 낫네, 굽은 잠에 말린 어머니 긴 머리칼이 넘실 윗목 검푸른 가방을 연다
튀어오르다, 식은 꽃숭어리.....
우리가 사라진 낡은 호마이카 장 아래는 불안이 맴도는 깜깜한 구조
어느 결, 구름 꼬아 늘어뜨린 어머니의 외틀린 계단을 밟고 왔나 화병 든 내가, 육교 밑 한증막 그늘 진 화단에서 시간 까맣게 터트린 분꽃을 꺾고 있다
길고 긴 병, 나선의 어둠 속으로 설핏, 꽃상여 요령 소리가 지나간다
이하율 시인 / 간장의 독을 덖다
아버지, 즐겨 부르시던 노래 따라 울 밑 봉선화가 만발해요
쉿쉿 밀고자 뱀이 염탐하듯 기어지나요 아고라 향 붉은 광장 옆을 지나도 집시법 위반이라 목 칭칭 감아 죄어요 울 밑에 구부리고 앉아 입술 달싹거려요 그때보다 더 오래된 시절이라고 착각하곤 재갈 문 듯 입 틀어막고 불러요 부릅뜬 간장 항아리에 긴 목늘여 입 절이며 기다려요
목마름을 다스릴 때 묵은 간장 찬물에 타 꼭꼭 씹어 마시라던 말씀 새겨요 간장의 결정들이 일어서 버그럭 버럭 호령할 금강의 날을 위해 저희도 오랜 간장의 사리처럼 덖인다면 사람 구실할 수 있을까요? 멍석에 둘러 앉아 재 묻힌 짚수세미로 놋그릇 닦던 눈먼 시절 같아요 아버지, 이제 빡빡 광내야 할 때가 되었어요 질기고 푸른 독 수년은 오롯이 공들여 닦아야 해요
거칠거칠 빨랫돌에 갈치 비늘 문질러 벗기던 각진 시절 맞지요? 탁한 강줄기의수심이 보이지 않아요 어리숙한 제 나이를 짚어주세요 지금이 바로, 초경인 줄 몰라 냉골 방에 배 깔고 울던 열여섯 살인가요. 숨찰 때 시름 얹어 처량히 부르시던 아버지의 애창곡, ‘울 밑에 선 봉선화’가 봉화를 활활 치켜 들어요 산송장 아닌 우리들이 목 터져라 불러요
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는 소녀 시대의 비망록을 다시 되작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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