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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초우 시인 / 싶을 때가 있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5.

이초우 시인 / 싶을 때가 있다

 

 

가끔 나는,

나를 잠시 보관할 길이 없을까 하고

한참 두리번거릴 때가 있다

 

내가 너무 무거워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었을 때

운명 같은 나를 버릴 수야 있겠냐만

꽤 귀찮아진 나를 며칠 간 보관했다가

돌아와 찾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무게나 부피를 가늠할 수 없지만

그래도 별로 크지는 않을 것 같아

지하철 역사 보관함 같은 곳에다

지친 내 영혼

하얀 보자기에 싸서

보관 좀 해 두고 싶을 때가 있다

 

쌓이고 쌓여

주저앉을 만큼 무겁게 느껴지는 그런 때

내 생生을 송두리 째 한 달포쯤 보관해 뒀다가

돌아와 찾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이초우 시인 / 아를르의 여인-지누부인*

 

 

  시간이 제자리로 돌아간 오전 10시의 카페 거실, 선인장 가시 같은 어깨깃, 나를 불러 세운 그녀의 각진 얼굴과 잘 어울린다 일찍 홀몸으로 꿋꿋하게 걸어온 그녀의 삶, 암반 같은 머리숱이 나이와 어긋나 있다

 

  그녀의 영혼, 아직도 펴 논 책 표지처럼 주홍이다 굳은 표정으로 턱을 괸 채 행간을 잊어버린 그녀, 의미 없는 창밖에 눈을 빼앗기고, 훌쩍 떠난 고갱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토악질을 하고 넘어질 듯 흐느적거리며 귀가하던 고흐의 뒷모습, 바람도 없는 그녀의 책장은 넘어가질 않는다 대모代母 같은 지누부인, 아직 떠나면 안돼 너의 등을 두드려 줄 내가 있잖아, 현기증 일으키는 진황색 거실 벽에서 후루루- 갑자기 바람소리 들리고, 그녀의 암반 속에 잠시 앉아 있던 내 몸이 휙휙 바람소리에 떠밀린다 노랗게 익은 밀밭이 기울고, 밀밭 사이 오솔길을 혼자 걸어가는 고흐, 그의 혼을 바닥내려 까마귀들 떼 지어 시꺼먼 하늘을 몰고 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이초우 시인 / 동백나무의 몽키파크*

 

 

  나를 너무 야하게 보질 마셔요

  나는 그래도 혹한 추위에 내 양식을 차곡차곡 저축해 두었거든요

  그러다 냉기 사라진 아지랑이 일렁이는 날이면

  나는 나를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나는 나르시시즘에 저려진 붉은 입술의 탕여인가봐요

  나는 정말 웃겨요

  나는 내 유두 같은 알을 자꾸만 낳아요

  땡글땡글 초록껍질의 알 말이에요

  내 잠 속에는 이런 줄거리가 반복되어 일어나곤 해요

  나는 가지라고 하는 내 팔에다 원숭이들을 키우거든요

  암컷이 자꾸 내 알을 핥아주어요

  그러면 내 알은 수컷 되어 뜨거운 혓바닥에 그만 부화를 해요

  초록껍질을 깨고 빼쪼롬이 내다본

  수컷의 빨간 그것 말이에요

  자꾸만 핥아주면 그 귀엽고 이쁜 것이 점점 커져요

  새순 햇살 흠뻑 간지럽히는 정오

  그만 둘은 질펀한 정사를 해요

  참 웃기지요

  그러고 나면 그렇게도 빠알간 꽃이 활짝 피어요

  그 꽃은 슈우 슈, 불을 마신 내 음순 같아요

  초록 손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이런 불은 끌 수가 없어요

  서운해 하겠지만 이 열병 오래 가진 않아요

  제발 나를 더 이상 야하게 보질 마셔요

 

* 말레시아 페낭항 언덕 원숭이 공원.

 

 


 

 

이초우 시인 / 파타고니아

 

 

  내가 가슴에 묻어 둔 바다는 남극의 끝자락 파타고니아의 해안이었어. 어느 날 나는 일렁이는 포물선 카리브해의 기스락에 떠 있었지. 수평선이 노을로 끓어오를 때 나는 보았어. 어슬어슬 그러다 잰걸음으로 사라지는 파타고니아의 뒷모습을, 갑판에 끊어질 듯 걸려있는 로우프를, 그물의 어깨를 찢어놓은 해저의 길목 지키던 날선 바위를. 나는 자주 새가 되는 꿈을 꾸었어. 날개 퍼덕여 휘감은 물안개를 떨쳐내고 깎아지른 빙하의 벼랑을 힘겹게 날아올랐지. 어스레한 아침이 사방에서 몰려오고 기지개를 켠 구름 한 점, 숨겨 둔 커다란 발자국 하나 꺼내 보였어.

 

 


 

이초우 시인

경남 합천에서 출생. 부경대 해양생산시스템공학과 졸업. 2004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1818년 9월의 헤겔 선생』, 『웜홀 여행법』이 있음. 제 3회 『열린시학상』 수상. 계간 『낯선시』편집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