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 시인 / 파킨슨 씨의 저녁
아주 천천히 느리게 눕는다
그녀의 눈은 발등에 붙어 있는 밥알에 쏠려 있다 밥을 향해 열린 탁한 눈동자가 집요하다 마른 손가락으로 밥알을 주워 입에 넣는다 잠시 가라앉는 침묵 밥알에 따라 붙는다
주운 밥 혀끝으로 말려들어 간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쉴 새 없이 되새김질한다
주름진 입가에 접혀 있던 그늘이 짧게 퍼진다
입으로 온 파킨슨 씨가 붉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저편 밥 짓던 저녁을 불러들인다
한참을 허공 속으로 그러쥐다 기억의 밥상을 차리고 있는지 흰 쌀밥 고봉으로 담아놓고 밥상 차렸으니 할아버지 들어오시라고 한다
밥알에 따라붙은 너무나 먼 침묵
이인, 『당신으로부터 사흘 밤낮』, 시인동네, 2020,16~17쪽
이인 시인 / 칠점사
머리에 일곱 개의 별을 단 뱀을 노인은 산 채로 유리병에 넣고 술을 붓는다
뱀의 익사를 본다 별의 익사를 본다
죽음을 들이는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좀처럼 자세가 취해지지 않는다
제가 뿜은 독(毒)에 취해 일곱 개의 별을 뱉어낸다
유리병 속에 북두칠성이 떴다
이인 시인 / 낮달
내 손바닥 위에 조약돌을 쥐여 주고 떠났다 돌을 움켜쥐고 크게 한번 흔들었다 썰물이 빠져나간 조약돌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화인처럼 내게 남겨진 조약돌
너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지구의 자전이 몇 번 있고서야 알았다
백중 때가 되면 손 안에서 잔물결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한낮에도 달은 뜨고 물결은 차오른다
어둠은 어쩌다가 달을 놓쳤을까?
이인 시인 / 흙 위에 쓰는 시
월간지로 나온 살구나무 책을 펼쳐든다 물관을 타고 오르는 활자들이 뿌리의 안부를 묻는다 아지랑이 토해내는 나무의 목록을 누가 흙 속에 새겨두었던 걸까 적산가옥 그 연혁이 펼쳐진 봄, 굴뚝은 제 붉은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연기만 자꾸 피워 올린다 그때 눈이 가려운 살구나무들이 꽃빛을 피운다 이따금 부리에 침을 바른 새떼들이 봄빛을 몰고 와 책장을 넘긴다 몇 년 전 타지로 나간 주인집 아들이 유골함으로 돌아왔다 봄비에 젖은 나무는 온종일 몸을 뒤척였고 새소리 바람 소리를 수피 속으로 가두었다 비에 젖은 파란 대문이 붉은빛으로 글썽이고 꽃숭어리가 빗소리에 다 털릴 즈음 소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봄밤이 늘어지지 말라고 솔잎 시침핀으로 지붕을 눌러놓았다
봄이란 책장이 쉽게 넘어가질 않는다
이인 시인 / 상강
목련은 기러기 날아간 곳으로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운다
북국(北國)을 향해 눈뜨는 꽃망울 어둠 찢고 나오는 풋잠
가지 끝, 저 먼 슬픔을 향해 손을 내밀어본다
얼굴만 가물거리는 사람 꽃으로 흘러갈 사람
한 숨결이 한 숨결을 먼발치에 묻고
당신으로부터 사흘 밤낮 돌아선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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