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목 시인 / 속초
음악을 물에 담그면 물고기 같을까? 이 방이 물에 잠겨 있다면 가스불은 산호초 같겠지. 무수한 순간이 지나간다고 해서 무수한 인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나의 푸른 침묵.
바다.
돌아와 동전과 담배와 해변을 꺼내놓은 그가
꽁꽁 얼어붙은 냉장고를 북극으로 가리키며 이건 만 년 전의 어항이야. 흰 서리 낀 얼음 한 알을 입속에 넣어준다.
어떤 음악은 멈춰 있다. 물수제비처럼 하늘을 지나가는 새들
다리가 보이지 않는다.
펼치면 물살을 가진 책. 자갈을 삶은 날의 공기. 검은 스피커처럼 물속은 켜져 있다. 올려다보면, 여태 물수제비 파장으로 스러지는 해가 남은 말로 흔드는 수면. 저 문을
열 수 있을까?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하필이면 빨갛게 생선찌개를 끓였다. 노을이 아름다운 날. 노을 속에서 조용히 녹고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 바다를. 호수를. 수돗가 세숫대야에 물고기처럼 일렁이던 저녁을. 아버지가 누이를 업고 달려갈 때 발에 차이던 세숫대야 흙바닥에 엎질러지던 밤을.
이제 본다.
그가 모든 이야기를 하나하나 얼굴로 가져가서는 문득. 밤은 누군가 바다의 문을 열어젖힌 시간이라는 것. 둘러앉아 밥을 먹다가 문 너머 서서히 어두워지는 골목까지 걸어온 심해를 찬바람으로 맞이하는 시간이라는 것. 말할 때.
밤을 동굴로 만드는 불빛 너머 거기 있다.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물고기를 늘어놓은 빨랫줄. 끝나지 않는 수평선. 왜 맨발이야? 달려가면 점점 더 멀어져서 끝내 걷을 수 없는 푸른 천.
신용목 시인 / 중고가전 수거 차량처럼
비온 뒤 지구는 커다란 비눗방울 속에 갇힌 것 같다. 울고 난 뒤 너는 너만큼의 비눗방울 속에 갇힌 것 같다.
차 마실래? 아니, 아무도 저어주지 않아서 물고기는 어항 속을 저 혼자 빙빙 돈다.
물고기는 녹지 않는다. 아픈 사람의 입술에 물려주는 젖은 헝겊처럼 빨래가 널려 있다. 빨래는 어항 같다. 아무도 마시지 않는다.
소리가 들린다. 차들이 왔던 길을 가는 소리. 물속처럼, 너는 오후를 조용히 보낸다. 후후, 불며 졸음이 졸음을 마시는 동안에도 옷은 조금씩 빨랫감이 되어간다.
책을 펼치고 어떤 문장도 읽지 않는다. 그래도 책 속에는 사랑이 있다. 이야기는 사막이거나 바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 위해 폭풍우를 건너는 낙타가 있고, 죽어버릴 거야. 문을 쾅, 닫고 나가서는 어느 모퉁이 식당에서 국수를 삼키는 순간이 있고 책 속에도, 책처럼 조용한 사람이 있다. 끝.
창문을 닫으려고 창가로 간다. 너머엔 학교가 있다. 여름이 운동장에 물길을 만들고 사라진 뒤 아이들은 다시 빗방울처럼 돌아올 것이다. 팔, 구, 사, 오, 전화번호를 크게 알리며 중고가전 수거 차량이 지나간다. 어항은 식었다.
신용목 시인 / 모래시계
잤던 잠을 또 잤다.
모래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잠이었다.
누구의 이름이든 부르면, 그가 나타날 것 같은 모래밭이었다. 잠은 어떻게 그 많은 모래를 다 옮겨왔을까?
멀리서부터 모래를 털며 걸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모래로 부서지는 이름을 보았다. 가까워지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해변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잤던 잠을 또 잤다.
꿨던 꿈을 또 꾸며 파도 소리를 듣고 있었다. 파도는 언제부터 내 몸의 모래를 다 가져갔을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 나는 돌아보았다.
신용목 시인 / 밤
검은 사내가 내 목을 잘라 보자기에 담아 간다 낡은 보자기 곳곳에 구멍이 나 있다
나는 구멍으로 먼 마을의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어느날 연인들이 마을에 떨어진 보자기를 주워 구멍으로 검은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꼭 한발씩 내 머리를 나눠 딛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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