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운 시인 / 내일을 향해서
밤하늘에 저물어 가는 시간 얼룩진 기억 저편 서럽게 쏟아지는 눈물
차마 버릴 수 없는 꿈들이 시도 때도 없이 흔들리고 제 힘에 지쳐 무너져 내리는 순간
상처의 잔해로 남아 대로는 어리 섞은 이탈로 실의에 빠져 세속에 시달리고
그래도 마음 하나로 지탱하며 어뚬을 뚫고서 한 걸음 내딛으니 새벽 종소리가 울려 퍼지네.
정다운 시인 / 각자의 세상
어떤 연애는 우화 같다 예를 들어 그는 나쁜 나라에서 태어났다 의사였으며 사람을 여럿 살렸다 애인이 한 무리의 짐승들에 둘러싸여 난자당했을 때 그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했다 기구 기술 기도 쏟아진 걸 도로 담을 순 없었다 자신의 두 손을 잘라 내고 싶었으나 가족이 애원했다 살라고 했다 살려면 떠나라고 했다 그의 몸은 그렇게 이곳으로 왔다
그해 봄 버스 안에서 그는 나를 만난다 눈이 마주친 사람을 끝까지 볼 줄 아는 어리고 용감한 사람의 등장이었다 버스 안으로 꽃잎이 날아드는 빤한 인트로를 보고도 어쩌면 다른 이야기가 될 거라며 덮지 못했다
축제엘 가고 싶었다 토마토 축제 문신도 해 보고 싶었다 그의 이름 쇼핑을 하다가 맥주를 마시러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몸에 묻히고 싶은 게 없었고 약속하고 싶은 게 없었으며 꽃도 맥주도 사 주지 않았다 그는 그냥 나를 기억하고 기억하고 기억하겠다고 했다
울었다 버림받고 싶지 않아서 선물이 받고 싶어서 인생의 고비가 여기인 거 같아서 그는 나에게 혀를 넣고 나를 움켜쥐고는 옥상으로 데려가 보여 준다 피가 말라붙고 짐승의 혀만 살아 움직이는 기괴한 곳 불타고 환했으며 가루가 되어 단단해지는 곳 그는 그런 곳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의 옥상에서는 세상의 한쪽만 보였다
내 방에 와 달라고 부탁을 한다 우린 다른 것을 보고 있다고 내 방은 숲도 사막도 아니고 환상이 터지는 분홍 벽지도 없지만 식은 침대 좋아하는 의자 정도가 있을 뿐이지만 발이 시리면 양말을 신고 낙서 위엔 사진을 붙이면 되었다 그가 와 준다면 청소를 하고 과자도 까고 속옷을 갈아입었을 것이다 더 가까이 붙어 앉아 웃기지도 않은데 웃음이 났을 것이다 그는 오지 않는다 피곤하다고 어쩌다 기막히게 멋진 얼굴로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사라져 버렸다 자기변명으로 가득 찬 멍청한 카드 한 장을 남기고서
실연의 기분은 견디기 어렵다 졸지에 내가 보는 세상은 음란하고 폭력적이 되었다 다정했던 날들은 벗겨지고 맞은 뒤에야 구석으로 기어가 쉴 수 있었다 밤새 천장에 묶여 있어야 할 때도 있었다 가슴 두 쪽만이 대롱거렸다 아무도 핥아 주지 않아 가여웠다
이제 돌아가는 건 글렀다 많은 이야기의 주제처럼 어쨌든 나아가야 한다 나약한 자는 약에 빠지고 조악한 자는 더 비틀리면서 바깥은 보는 대로 변해 갈 것이다 다음에 내게 다가오는 사람에게 왜 이만큼밖에 해 줄 수 없는지 보여 줘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의 방엔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두 인물은 운이 좋으면 같은 곳에서 늙어 가게 될 것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다른가, 하고 의문을 품게 되겠지 자기만의 불완전한 세상을 감시하느라 피곤해지겠지 아무도 잘못한 게 없으나 누구나 외로울 것이다
정다운 시인 / 과육
미안하다 먼저 내린다 못 견디겠다 무서울 정도로 싫다 싫어졌으니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나는 이만
자전거를 주워 타고 이 언덕을 굴러 내려와 벽 앞까지 벽이 노랗게 달려들 때까지 먼저 겁먹는 놈이 지는 거라고 결코 뛰어내리지 않는 당신
잘 익은 토마토처럼, 탁, 터지게 되어 있다
나는 붉고 살이 무르고 꼭지가 이미 졸아든 식물이다 당신이 이기지 않아도 내가 지게 되어 있으니 디지 못하는 사람들을 그만 노려보길
당신처럼 멋지게 터져버리지 못해 미안하다 내가 돌아와서 가족들은 오늘밤 안도한다 중요한 건 그뿐 내 한 몸을 보전했으니 그 몸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겠다
(정다운의 과육 전문, 현대시 2012. 5. 호에 발표).
정다운 시인 / 어느 봄날에
햇빛 좋은날 청아한 새들의 노래 소리 변화무쌍한 자연의 신비 초록의 멍울을 터트리고 꽃들은 봄을 노래한다
코끝을 자극하는 향긋한 꽃 내음 침묵과 고요 속에서도 어디선가 꽃송이들이 내려와 끝없이 피어내는 핑크빛 사연들
화려함과 덧없음 사이로 시시각각 변화는 채움과 비움이 그들만의 시간을 가로 지른다
정다운 시인 /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에
뭉게구름도 쉬어가는 맑은 하늘 삶에 무게에 짓눌러 드러난 허한 가슴 그냥 스치는 일상 속에 바람 한끝 스며든다
거친 세상에 울고 웃는 날에 인생의 한고비를 넘어 소중한 보금자리 만들어 결혼생활에 저저든지 오래
내 나이만큼 주름은 늘어가고 눈물에 붙잡힌 야속한 세월 개미처럼 일하고 열 받을 일이 많은 세상
때로는 마음의 그늘 속에서 헤맬 때도 많지만 나를 기다려 주고 내 이름을 불러 주고 언제나 제자리를 지킬 수 있는 힘은 사랑하는 가족이 옆에 있기에 꽃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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