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섭 시인 / 개와 함께 걷는 저녁
나에게도 목줄이 메어 있는 것 같습니다 길어진 그림자가 걸음을 재촉합니다 아무리 달아나도 벗어날 수 없는 거리는 정해져 있습니까 목숨과 목줄은 다른 말입니까 나를 끌고 가고 있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를 방목하지 못하는 당신의 불안이 궁금합니다 내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를 위한 기도를 듣고 싶습니다 아무도 나를 위해 울어주지 않는 것 같아요 아무도
자주 뒤돌아보게 됩니다 당신의 손은 줄에 대해 다정합니까 우리는 직선과 곡선 사이에서 웃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갔다가 돌아와야 하나요 나는 대체 누가 기르는 개입니까
계간 『백조』 2021년 여름호 발표
이계섭 시인 / 데자뷔
—태몽은 처음으로 내 꿈을 누군가가 대신 꾸어주는 일이다 나보다 꿈이먼저 존재하던 세계가 있었다
하늘에선 해초들이 썩은 동아줄처럼 자랐다고 했다 해녀인 외할머니를 따라 엄마가 들어간 바닷속에는 하얀 메기가 아가미를 뻐끔거리며 눈알을 부라리고 있었다고
이봐 눈을 감지 못하고 잠드는 꿈속을 상상해 봤어? 어류들은 지상으로 끌려 올라가면 제일 먼저 눈이 말라버리지 우리가 바다를 떠날 수 없는 건 눈물이 없기 때문이라네
가여워라 세상에나! 하얀 메기를 끌어안고 엄마는 밤새 어둠보다 짙은 슬픔을 나눠 주었다고 썩을 년 망할 년 욕을 하며 외할머니는 그날 밤 해초들을 잡고 하늘로 올랐다 엄마가 새벽잠에 전화를 받은 시간 외할머니는 나의 웜홀이다 데자뷔다
엄마는 미역을 먹지 않았다 피가 맑아지기보다는 맑은 피를 마시길 원했다 몸이 약한 슬픔을 이기지 못해 마셨던 비린 피가 있다 소화되지 못한 두려움들이 엄마의 뱃속에서 두근거렸다 엄마 밤이 되면 누군가 내 눈앞에 손전등을 비추고는 목구멍까지 미역을 밀어 넣는 꿈을 꾸고 있어요 엄마의 두려움 속에는 누가 살고 있는 건가요 오래전에 나는 밤을 잃어버렸어요 엄마!
잠이 들면 엄마는 내 눈두덩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류는 지상에 끌려오면 제일 먼저 눈이 마르는 법이지 나는 네가 네발로 걷던 때를 기억하고 있어 보조개가 아가미처럼 씰룩이고 있었지 지느러미는 어디다 두었니 얘야 사산된 너의 조각들은 어디로 흩어지게 되었니 차가운 음성이 축축한 잔물결로 온몸을 휘감아 돌았다
생각해보면 나와 엄마는 같은 슬픔을 기르는 깊은 바다였는지도 모르겠다
계간 『백조』 2021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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