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화 시인 / 타인과 마리오네트의 사이
관객들 틈에서 우리는 왜 숨을 곳이 없을까요 소녀는 팔과 다리에 감긴 실을 튕기며 묻습니다 암전처럼 켜지는 둥근 조명은 늘 우리를 감시하지 입술에 코랄 틴트를 덧칠하며 휘장을 들춰보는데 자신들이 지르는 소리에 갇힌 저 사람들의 흥미가 무섭지 않니 소녀가 눈물점을 찍으며 웃습니다 저들은 춤을 추고 있는지도 몰라 몸속 깊숙이 꽂힌 서로의 칼날 같은 시선을 숨긴 채 소년이 녹슨 건반처럼 삐걱대는 뼈마디의 세기를 견딥니다 너는 관절 꺾인 다리를 만지면 어두운 상자 속 뭐가 보이니 마스카라 솔로 실크 속눈썹을 빗질합니다 어둠 속 얼굴을 비추면 나를 묶고 있는 박탈감이 보이지 소년의 무거운 목소리에 추가 달립니다 수천 개의 눈에 갇힌 나를 왈칵 토해내고 싶은데 어쩌지 타인의 삶이 살갗 같아서 벗겨낼 수 없어 내일도 우리는 박수소리를 맞으며 춤을 팔고 있을까 낮게 속삭이며 소녀는 울먹입니다 저 환호성들, 어쩌면 박음질 된 입안의 통증을 앓는 소리일지도 모르지 우리처럼 말이야 손등에 터진 솔기를 접으며 소년이 입을 뻐끔댑니다 타인의 얼굴로 타인과 밥을 먹고 타인과 키스를 하지요 빛 속에 갇혀 오늘을 더듬대는 장님의 춤, 타인의 춤을 추는 우리 흥얼대는 소년의 몸에 채찍이 감깁니다 소녀는 체념하듯 객석을 향해 포즈를 취합니다 진하게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싶은 날이야 타인의 웃음 끝에 걸린 질긴 놀이를 무사히 끝내려면 객석을 봐, 저들의 시나리오는 끝나지 않아 당신은 누구의 마리오네트입니까 춤으로 묻지만 저들은 귀가 없잖아, 빈 환호성만 있을 뿐 소년의 말에 소녀는 관객들 표정을 살핍니다
《시로 여는 세상》2016년 겨울호
이은화 시인 / 프리지아
햇빛을 빨아먹는 여자 당뇨병 약봉지를 움켜쥐며 발목을 내려다본다
가위에 잘리고 불에 달궈진 기억 목 힘줄 팽팽해지며 턱이 떨린다 눈을 감자 몸속에서 꽃 피우는 신음소리 들린다
잘린 발목이 썩기 전 고통을 말려야 해 창자 속까지 가벼워져야 해
온전히 남은 왼쪽 발이 더 고통일거라 울먹이는 여자 알약을 삼킨다
햇빛이 소독 냄새처럼 싸한 병실 만개하는 프리지아 꽃 단내
여자가 휠체어에 단정히 꽂혀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다운 시인 / 내일을 향해서 외 4편 (0) | 2021.09.25 |
---|---|
신용목 시인 / 속초 외 3편 (0) | 2021.09.25 |
이인 시인 / 파킨슨 씨의 저녁 외 4편 (0) | 2021.09.25 |
이하율 시인 / 브람 스토커의 활주로 외 4편 (0) | 2021.09.25 |
이초우 시인 / 싶을 때가 있다 외 3편 (0) | 2021.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