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현대문학상 수상작 황인찬 시인 / 이미지 사진
아름다움 하나 나무 의자 둘
잠시 찾아와서 내려앉는 빛
이 장면은 폐기되었고
이해하자 좋은 마음으로 그런 거잖아 하나 서양 난 화분이 쓰러진 모양이 둘
너는 그런 걸 어떻게 다 기억하나(다 날아가고 눈 코 입만 남은 사진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날들의 기억)
사진관에 모이는 것으로 마음을 남기던 시절의 기억 속으로 내려오는 저녁이 하나 휘어지는 빛이 둘
(이 순간을 어떤 영화에서 본 것만 같다고 잠시 느꼈을 때, 그것이 어떤 시절에만 가능한 착각이라는 점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나서의 부끄러움)
죽은 아름다움 하나 부서진 나무 의자 다섯
자꾸 뭘 기억하려고 그래(여전히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빛) 예전에는 이렇게 많이들 날려서 찍었지?
(작은 강의실이 젊은 옛날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미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귀를 기울이세요 말하는 사람과 이미지인데 왜 귀를 기울여요 말하는 사람)
웃으세요 친구끼리 왜 그렇게 멀찍이 서 있어요
그 말을 듣고 그냥 웃는 사람의 얼굴이 하나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의 사라짐
그 장면은 경험하지 않은 것으로 하고
빛이 들어가면 다 상하니까
어둡고 서늘한 곳에 보관하세요
불 꺼진 실내에 웅크리고 앉은 빛
황인찬 시인 / 받아쓰기
바다 쓰기가 뭐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이거 삼십 년 전 필름인데 인화할 수 있나요?” “뽑아봐야 알 것 같은데요”
사진관에 앉아 기다리는데 그런 말이 들려왔다 나는 바다를 쓰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만
“이 사람 멋있네요” “죽었어요”
겨울 바다는 너무 적막해서 아무것도 받아 적을 말이 없었다 바닷바람은 자꾸 뭐라고 떠드는데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쓰기요 받아쓰기
매년 바다가 넓어진다고 했다
“이 사람은 친구 동생인데 죽었어요”
나는 흰 벽을 뒤로 두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턱을 당기세요 이쪽을 보세요 미소, 아주 조금만요 지시를 따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죽은 사람이 웃고 있으면 너무 이상해”
터지는 소리가 나고 빛이 보이고
화면 위로 보이는 얼굴은 모르는 사람
바다를 어떻게 써요 왜 쓰는데요
바닷가에서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겨울 바다 위를 물새들이 돌고 있었고
“조금 돌아갔어요 이 사진은 안 되겠어요” 그런 말을 들었다
황인찬 시인 / 흐리고 흰 빛 아래 우리는 잠시
조명 없는 밤길은 발이 안 보여서 무섭지 않아? 우리가 진짜 발 없이 걷고 있는 거면 어떡해
그게 무슨 농담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너는 어둠 속에서 말했지
집에 돌아가는 길은 멀다 가로등은 드문드문 흐리고 흰 빛
이거 봐, 발이 있긴 하네
흐린 빛 아래서 발을 내밀며 너는 말했고 나는 그냥 웃었어
집은 아주 멀고, 우리는 그 밤을 끝없이 걸었지 분명히 존재하는 두 발로 말이야
발밑에 펼쳐진 바닥없는 어둠은 애써 모르는 척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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