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박주하 시인 / 빗방울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4.

박주하 시인 / 빗방울들

 

 

더 멀리 가봅시다

가장 멀리 가는 길을 알고 있는 것처럼

멀리 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각자 자기소개는 하지 맙시다

완벽한 하나의 사건처럼

순식간에 불거졌다가 사라집시다

시간이란 슬픈 눈망울을 버리고

흘러내리는 것은 목숨을 만져보는 일

전생에서도 잊지 못한 미소를 생각하며

최대한 멀리 뛰어내려 봅시다

서로의 어깨를 부축하지도 말고

젖을수록 단단해지는 돌멩이처럼

이 밤을 훌쩍 넘어갑시다

거짓말을 들은 기색 없이

서로의 눈물만 들고 바닥으로 달아납시다

바닥은 힘이 없으니 장렬하게 무너집시다

불빛이 비에 젖어 번지는

저 길바닥의 무늬 속으로 사라집시다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걷는사람, 2021) 중에서

 

 


 

 

박주하 시인 / 줄에 관한 생각

 

 

거문고에 줄이 없었다면

누가 줄을 튕겨 심연을 건드려 보았을까

 

어미가 줄을 놓아주었으니

새끼도 그 줄을 타고 지상에 발을 들였겠지

 

탯줄을 감고 노래 부르고

탯줄을 타고 춤을 추고

한 올 한 올

서로를 튕겨주는 믿음으로 즐거웠으나

 

약속에 매달리고

관계에 매달리고

 

그 줄 점점 얇아지고 가늘어졌으니

돌아갈 길이 멀고도 아득하여라

 

몸으로 엮었던 줄을 마음이 지워버렸네

 

서로에게 낡고 희미해져

먼지처럼 가늘어진 사람들

 

요양원의 투명한 링거줄에 매달려있네

잃어버린 첫 줄을 생각하네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걷는사람, 2021) 중에서

 

 


 

박주하 시인

경남 합천에서 출생. 숭의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6년 《불교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항생제를 먹은 오후』와 『숨은 연못』,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이 있음. 2006년 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