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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석연경 시인 / 사랑, 허벅지라는 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6.

석연경 시인 / 사랑, 허벅지라는 말

 

 

가끔은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고 싶은 날이 있다

누군가의 허벅지를 베고

눕고 싶을 때가 있다

봄물 드는 꽃봉오리 보고 앉아

종일 네 생각만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날에는 너만도 나만도 못한

너보다도 나보다도 잘난

사람의 살냄새를 맡고 싶다

 

생각해보니 나는 세상이

거대한 곳이라는 생각을 한 적 없다

누군가의 허벅지

거기에 기대어보는 그 편안함이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더 깊게 느껴질 때가 있다

 

허벅지는 다 가지지 않는 사랑이다

거기서 멈춤과 그러고도 깊은 나눔의 마음이다

허벅지에서 멈춘 우리의 사랑.

 

석연경, 『독수리의 날들』 ,천년의 시작, 2016, p.65.

 

 


 

 

석연경 시인 / 복숭아 성전

 

 

불들어 갑니다

아무것도 가지지않은 불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제것아니라고

봄날을 활활 탄다

비우다 투명하게 사라진

분홍분홍 복숭아 꽃잎

바람의 머릿결이

불의긴 옷자락을 집어당기는데

아무것도아닌 풍경의 절벽

생의 바깥이란 없어서

안개비 자욱한 저녁

시간의 숨소리 따라

설레는 복숭아 나무가

불꽃의 심장을 식히고 있었다

분홍분홍 불이 발갛다

다시 봄이다

봄의 새악시다

 

 


 

 

석연경 시인 / 계요등

 

 

여름을 어떻게 견디는지

별 하나가 가슴속으로 떨어진다

 

이제는 잔별이 모이고 모여

사람의 숲속에 별 가득하니

별보다 작은 마음들이

저물어가는 저녁을

환하게 밝힌다

 

여름 한낮 목마른 계요등

눈송이 뽀얗게 묻힌 채

이제 가을이 올 것이라고

이제 당신이 따 먹을

달짝지근한 열매가

붉은 별로 알알이

당신의 가을을 깜박이고 있을 거라고

 

가서 말하라

독한 내 냄새는 당신께만 드리고자 하는 내 마음이니

 

오르지 못할 것이 어딨나

온몸 둘둘 말아

시든 나무도 촉촉이 살리는

잔별들 마음이 붉디붉다

 

이 저녁 계요등 별

가을에게로 총총 뜬다

 

석연경 시집『섬광, 쇄빙선』중에서

 

 


 

석연경 시인.평론가

1968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 건축 문예창작 국어국문학 전공. 《시와 문화》 시 등단, 《시와 세계》 평론 등단. 시집으로 『독수리의 날들』 (천년의 시작, 2016)이 있음. 현재 연경인문문화예술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