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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휘민 시인 / 부정맥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6.

휘민 시인 / 부정맥

 

 

심장을 안고 돌아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기어이 따져볼 이야기가 남았다는 듯

결이 다른 말들이 어둠 속에서 튀어오른다

 

비주룩이 열린 창틈으로 풀벌레 소리가 건너온다

곁에 두고도 마음이 알아채지 못한 기척들을 향해

슬그머니 귀가 먼저 열린다

 

혈관은 응어리진 기억이 돌아다니는 상처의 회로

아군의 패배를 타전하는 전장의 통신병일까

누군가 엇박자의 리듬을 내 몸에 전송하고 있다

 

푸가와 스타카토를 오가는 마음의 고동

눈썹을 내려놓고 구불거리는 소리의 길을 따라가지만

나는 번번이 전생의 문턱에서 기억을 놓친다

 

거칠어지는 들숨과 날숨 사이로

내가 읽지 못하는 우주의 문자인 듯

무심히 시절 하나 흘려보낸다

 

오늘밤 또 당신이 나를 다녀간다

 

계간 『딩아돌하』 2019년 겨울호  발표

 

 


 

 

휘민 시인 / 수목한계선

 

 

우리는 숲으로 갔다

없는 주머니를 그리워하면서

 

- 여기 어디쯤 아니었니?

그때 우리가 이곳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심었잖아.

 

나뭇잎들이 허공을 움켜쥔 채 오그라들고 있었다

태양은 더 뜨거워졌다

 

산 중턱에 이르자 나뭇가지들이 일제히 북쪽으로 쏠려 있었다

앞으로나란히를 한 채 단체로 벌을 받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해마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렸지만

산타할아버지는 끝내 오시지 않았어.

우리에겐 크리스마스트리가 없었으니까.

 

더이상 갈증을 참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

그사이 태양은 더 뜨거워졌다

 

정상 부근에는 뿌리 뽑힌 나무들이 누워 있었다

산빛이 온통 죄의 빛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의 발자국이 찍힌 초록의 길들은 어느새 지워지고 없었다

발등이 부은 침엽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을거야.

우리는 해수면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거든.

주머니가 있었다면 빵 조각이라도 넣어 왔을 텐데…….

 

우리가 찾으려 했던 나무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사이 태양은 더 뜨거워졌다

 

침엽, 하고 부르면

입을 다물고 있어도 목이 말랐다

송곳처럼 뾰족해진 별들이 마른 목구멍에 박히는 밤이었다

조난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숲에 있는 동안 우리는 같은 꿈을 꾸었다

스스로 자신의 부고를 발송하는 꿈이었다

 

계간 『문학과 창작』 2020년 겨울호 발표

 

 


 

휘민 시인

1974년 충북 청원에서 출생.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당선. 시집으로 『생일 꽃바구니』,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가 있고, 동화집 『할머니는 축구선수』와 그림책 『빨간 모자의 숲』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