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인 시인 / 반반
양념 반 프라이드 반은 가장 아름다운 조합 모가지와 다리가 평등하게 잘려 버무려지고 바싹하게 튀겨져 목구멍 너머로 꿈결처럼 사라지는 날개들 반반은 내가 아는 최초의 얼굴 자정에 얼굴을 가리면 반은 여자고 반은 남자라는 반반은 내가 아는 가장 유쾌한 비밀 오른뺨은 어둠으로 왼뺨은 희미한 빛으로 서로를 향해 아코디언처럼 부풀다 터지는 울음 주머니 반반은 그러니까, 제법 슬픈 주름 내려가도 끝이 없는 계단 오른쪽과 왼쪽 사이좋게 닳아가는 무릎들 1월과 7월의 달력에서 따로 따로 죽은 채로 발견되는 너무 작은 신들의 이름 정성껏 고를수록 실패하는 선물들 그러니까 반반은 내가 출근 할 때 두고 오는 그림자들 너는 정말 시인 같지 않아, 동료들이 이런 말로 나를 칭찬할 때 나대신 술 마시고 욕을 하고 울며 시 쓰는 하찮은 마음들 한 짝은 고독 쪽으로 한 짝은 환멸 쪽으로 팽개쳐버린 구두 반반하게 낡아가는 심장들 너는 정말 시인 같지 않아, 내가 무심코 시집을 펼칠 때
월간 『현대시』 2020년 2월호 발표
김경인 시인 / 에우리디케
나는 얼마나 멀리 있는 걸까요 둥근 무늬로 두근거리던 나무 테두리로부터 흰 모슬린 커튼처럼 부드러운 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으로부터 가득한 두 손 흘러넘치던 치맛자락 풍성한 꿈, 그 가지런한 주름으로부터
올페여, 나를 연주하지 마세요 나는 나에게서 버려진 악기, 검게 물결치는 강의 입술이 흘려보내는 희미한 글자랍니다
시간의 연한 뒤꿈치는 스스로 잘랐죠 슬며시 내 곁에 선, 조그맣고 차가운 고통 옆에 주저앉히려고요 눈은 이제 죽은 이들의 고독한 창문을 향해서만 열려요
나는 슬픈 뱀처럼 길을 끌고 다녀요 밤하늘을 헤아려 내일을 점치는 대신 우울한 낯빛으로 평생 뒤척이는 흙을 어루만집니다
이곳엔 갈 곳 없는 울음들 뿐 작디작은 포자로 떠다니다가 누군가의 습기 가득한 생에 내려앉아 텅 비고 메마른 얼굴마다 번질 때 한꺼번에 흐느끼는 음악을 듣기 위해 나는 여기 저기 버섯처럼 돋아나는 귀를 주워요
당신은 딱 한 번 뒤돌아보는 자 슬픔으로 절룩이게 나를 등 뒤에 두세요 내가 디디는 세계가 깊이 저물 때까지
올페여, 당신과 나는 영원히 등을 맞대고 각자의 방향으로 내달리는 음계 나는 기꺼이 사라지는 당신의 악기
나는 나로부터 겨울입니다 눈보라로 흐느끼며 떠돌아요 누군가의 뺨에 얼룩질 차가운 눈송이 나는 끝내 아름답지 않을 노래
계간 『시와 사상』 2021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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