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시인 / 산을 오르며
산을 오르기 전에 공연한 자신감으로 들뜨지 않고 오르막길에서 가파른 숨 몰아쉬다 주저앉지 않고 내리막길에서 자만의 잰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평탄한 길에서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잠시 무거운 다리를 그루터기에 걸치고 쉴 때마다 계획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서는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 두 갈래 길 중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를 때도 당황하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도 세심히 살펴 길 찾아가게 하소서
늘 같은 보폭으로 걷고 언제나 여유 잃지 않으며 등에 진 짐 무거우나 땀 흘리는 일 기쁨으로 받아들여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매여 있지 않고 오르는 길 굽이굽이 아름다운 것들 보고 느끼어
우리가 오른 봉우리도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임을 알게 하소서 가장 높이 올라설수록 가장 외로운 바람과 만나게 되며 올라온 곳에서는 반드시 내려와야 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산 내려와서도 산을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도종환 시인 / 공소
주말 오후 시골 공소에 가자 느티나무 잎 다 지고 몇 개 남은 이파리로 은행나무가 바르르 떨리는 마음을 인사로 대신하는 날 혼자 서늘히 있다 오자 미움과 분노 말고도 몸을 적시는 것들이 많아 출렁일 때 물결에 집착해 바다를 보지 못하고 있을 때 시시비비의 영역에 갇혀 광활한 벌판을 잃어버렸을 때 공소의 나무 십자가에게 조용히 물어보자 요란하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갈수록 세상의 목청이 커지고 있으므로 겸허한 시간이 손짓해 나를 부르는 날 그 시간을 만나러 가자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는 날 내 확신이 다른 이들의 생을 찌르는 무기가 되어 있을지 모르니 적막한 시간이 서성대는 공소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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