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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도종환 시인 / 산을 오르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5.

도종환 시인 / 산을 오르며

 

 

산을 오르기 전에 공연한 자신감으로 들뜨지 않고

오르막길에서 가파른 숨 몰아쉬다 주저앉지 않고

내리막길에서 자만의 잰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평탄한 길에서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잠시 무거운 다리를 그루터기에 걸치고 쉴 때마다 계획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서는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

두 갈래 길 중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를 때도 당황하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도 세심히 살펴 길 찾아가게 하소서

 

늘 같은 보폭으로 걷고 언제나 여유 잃지 않으며

등에 진 짐 무거우나 땀 흘리는 일 기쁨으로 받아들여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매여 있지 않고

오르는 길 굽이굽이 아름다운 것들 보고 느끼어

 

우리가 오른 봉우리도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임을 알게 하소서

가장 높이 올라설수록 가장 외로운 바람과 만나게 되며

올라온 곳에서는 반드시 내려와야 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산 내려와서도 산을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도종환 시인 / 공소

 

 

주말 오후 시골 공소에 가자

느티나무 잎 다 지고

몇 개 남은 이파리로 은행나무가

바르르 떨리는 마음을 인사로 대신하는 날

혼자 서늘히 있다 오자

미움과 분노 말고도

몸을 적시는 것들이 많아 출렁일 때

물결에 집착해 바다를 보지 못하고 있을 때

시시비비의 영역에 갇혀

광활한 벌판을 잃어버렸을 때

공소의 나무 십자가에게 조용히 물어보자

요란하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갈수록 세상의 목청이 커지고 있으므로

겸허한 시간이 손짓해 나를 부르는 날

그 시간을 만나러 가자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는 날

내 확신이 다른 이들의 생을 찌르는

무기가 되어 있을지 모르니

적막한 시간이 서성대는 공소에 가자

 

 


 

도종환 시인

1954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84년《분단시대》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두미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릉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등이 있고,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배』,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모과』,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등과 동화 『바다유리』 등이 있음. 1997년 제7회 민족예술상 수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