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시인 / 이 도시의 트럭들
돼지들은 이미 삶을 반납했다 움직일 공간이 없으면 움직일 생각도 사라지는지 분홍빛 삶이 푸대자루처럼 포개져 있다
트럭에 실려가는 돼지들은 당신에게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키는가
짝짓기 직전 개들의 표정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들의 눈망울에서 당신은 어떤 비애를 읽어내는가 아니, 그 표정들은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 도시의 트럭들은 너무 많이 싣고 너무 멀리 간다
엿가락처럼 휜 철근들과 케이지를 가득 채운 닭들과 위태롭게 쌓여 있는 양배추들과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 같은 원목들을 싣고 트럭들은 무엇을 실었는지도 잊은 채 달린다
커브를 돌 때마다 휘청, 죽음 쪽으로 쏟아지려는 것들이 있다
나희덕 시인 / 헐거인간
이 도시의 지하는 생각보다 깊어요 뿌리들이 나무를 지탱하듯 빌딩들이 버틸 수 있는 건 지하세계 덕분이지요
몇 그램의 절망이 일용할 양식이 되는 곳
어두운 계단과 구멍들 사이로 기적처럼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는 곳
내일을 꿈꿀 필요가 없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곳
산소 없이 살 수 없지만 너무 많은 산소에도 견디지 못하는 우리는 썩은 고기로 숨 쉬는 법을 배웠어요
인간이라는 비루한 감옥에 갇혀 살기는 지상이나 지하나 마찬가지 물론 지하세계에도 시장과 학교와 교회가 있어요
우리는 투명인간처럼 살지만 그렇다고 빛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이 세계에서는 전구들이 태양을 대신하지요 빛의 찌꺼기들은 모두 여기로 와요
아직은 쓸 만한 전구들이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방
우리에겐 더 깊고 투명한 집이 필요해요 검은 흙 속으로 끝없이 뻗어가는 흰 뿌리들처럼
지상으로 난 환기구에 풀들이 자라기 시작했어요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나희덕 시인 / 벗어놓은 스타킹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生의 얼굴은 촘촘한 그물 같아서 조그만 까끄러기에도 올이 주르르 풀려나가고 무릎과 엉덩이 부분은 이미 늘어져 있다 몸이 끌고 다니다가 벗어놓은 욕망의 껍데기는 아직 몸의 굴곡을 기억하고 있다 의상을 벗은 광대처럼 맨발이 낯설다 얼른 집어들고 일어나 물속에 던져 넣으면 달려온 하루가 현상되어 나오고 물을 머금은 암말은 갈색빛이 짙어지면서 다시 일어난다 또 다른 의상이 되기 위하여
밤새 갈기는 잠자리 날개처럼 잘 마를 것이다
나희덕 시인 / 파일명 서정시*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
파일에는 가령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머리카락 한 줌 손톱 몇 조각 한쪽 귀퉁이가 해진 손수건 체크무늬 재킷 한 벌 낡은 가죽 가방과 몇 권의 책 스푼과 포크 고치다 만 원고 뭉치 은테 안경과 초록색 안경집 침묵 한 병 숲에서 주워온 나뭇잎 몇 개
붕대에 남은 체취는 유리병에 밀봉되고 그를 이루던 모든 것이 '서정시'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서정시들과 함께
그들은 이런 것조차 기록해 두었을 것이다
화단에 심은 알뿌리가 무엇인지 다른 나라에서 온 편지가 몇 통인지 숲에서 지빠귀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옷자락에 잠든 나방 한 마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하루에 물을 몇 통이나 길었는지 재스민 차를 누구와 마셨는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대출받았는지 강의 시간에 학생들과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저물 무렵 오솔길을 걷다가 왜 걸음을 멈추었는지 차로 국경을 넘으며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이 사랑의 나날 중에 대체 무엇이 불온하단 말인가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 마음의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 자물쇠 고치는 노역에도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파일명 '서정시' 에서 풀려난 서정시들은 이제 햇빛을 받으며 고요히 반짝인다
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 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 Deckname 'Lyrik'.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체에 대해 수집한 자료집.
나희덕 시인 / 새로운 배후
새로운 배후가 생겼다 그들은 전화선 속에서 숨죽여 듣고 있다가 이따금 지직거린다, 부주의하게도
그는 엿들으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어쩌면 그는 아주 선량한 얼굴을 지녔을지 모른다 절제된 표정과 어투를 지닌 공무원처럼 경험이 풍부한 외교관처럼 이삿짐센터 직원이나 택배 기사처럼 무심한 얼굴로 초인종을 눌렀는지도 모른다
문 뒤에 서 있는 투명인간들 주차장 입구에서 현관문 앞에서 복도의 계단에서 우연히 마주친 듯 지나는 낯선 얼굴들
개 한 마리가 마악 내려놓은 쓰레기봉투를 킁킁거리다 사라진다
그러나 배후는 배후답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어느 날 귓바퀴를 타고 들어와 잠복 중인 발소리
새로운 배후가 생긴 뒤로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귀가 운다 피 흘린다 풀벌레들이 낮밤을 가리지 않고 운다 한겨울에도 운다 끈질기게 끈질기게 고막을 파고든다
쉬잇, 그들이 복도를 지나고 있다
나희덕 시인 / 산 속에서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 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나희덕 시인 / 늦게 죽은 사람들
불에 그을린 다섯 구의 시신 장례도 치를 수 없어 영안실 냉동고로 옮겨졌다 그러나 어떤 냉기도 그들을 얼릴 수 없었다
2009년 1월 19일 용산 4구역 남일당 망루,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던 그들은 불길 속에서 살려 달라고 외치던 그들은 냉동고 속에서도 외쳤다
너무, 뜨거워요. 여기, 사람이 있어요. 이 뜨거운 얼음 속에서, 우릴 좀 꺼내주세요.
영하 이십 도의 냉동고 속에서 불을 앓던 사람들은 355일 만에야 풀려나 흙으로 돌아갔다 너무 늦게서야 죽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유리로 된 마천루와 주차장이 들어섰다 흙과 불의 기억은 지워졌다
완벽하게 포장되어 그날의 기억이라곤 남아 있지 않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그곳에서 두리번거렸다 그날의 화염과 비명의 메아리를 아스팔트 위에서 기억해 내려고
그해 여름 용산역 앞에서 전단지를 나누어주던 내 손목이 떠올랐다 전단지를 받아들거나 내팽개치던 행인의 손목들이
너무 늦게 죽은 사람들을 너무 일찍 잊어버린 사람들 속에 오래 서 있었다
멸종한 꿀벌의 문양을 제 몸에 간직한 꿀벌난초처럼
《상상인》 2021.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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