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시인 / 산
강물을 따라 걸을 때 강물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흐르는 거야 너도 나처럼 흘러봐
하얗게 피어 있는 억새 곁을 지날 때 억새는 이렇게 말했네 너도 나처럼 이렇게 흔들려봐 인생은 이렇게 흔들리는 거야
연보라 색 구절초 꽃 곁을 지날 때 구절초 꽃은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한번 피었다 지는 꽃이야 너도 이렇게 꽃 피어봐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를 지날 때 느티나무는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뿌리를 내리고 그 자리에서 사는 거야 너도 뿌리를 내려봐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밑을 지날 때 구름은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허공을 떠도는 거야 너도 그렇게 정처 없이 떠돌아봐
내 평생 산 곁을 지나다녔네 산은 말이 없었네 산은, 지금까지 한마디 말이 없었네
김용택 시인 / 봄비
바람이 붑니다
가는 빗줄기들이 옥색실처럼 달려오고 나무들이 춤을 춥니다
그대에게 갈까요 말까요
내맘은 절반이지만 날아온 가랑비에 내 손은 젖고 내 맘도 벌써 다 젖었답니다
김용택 시인 / 사랑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이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이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속의 아픔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참된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이뻐 보이고 소중하게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 당신으로 어어지던 날들과 당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얹은 어느 날 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 우리 둘인 참 좋았습니다
이 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 그러나 다 내 조국 산천의 아픈 한 봄입니다
행복하시길 빕니다
안녕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희덕 시인 / 이 도시의 트럭들 외 6편 (0) | 2021.10.05 |
---|---|
허형만 시인 / 우리가 원하는 것 외 2편 (0) | 2021.10.05 |
전다형 시인 / 한정판 외 5편 (0) | 2021.10.05 |
문현미 시인 / 어머니의 우물 외 1편 (0) | 2021.10.05 |
박재삼 시인 / 무더위의 시 외 1편 (0) | 2021.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