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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용택 시인 / 산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5.

김용택 시인 / 산

 

 

강물을 따라 걸을 때 강물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흐르는 거야

너도 나처럼 흘러봐

 

하얗게 피어 있는 억새 곁을 지날 때 억새는 이렇게 말했네

너도 나처럼 이렇게 흔들려봐

인생은 이렇게 흔들리는 거야

 

연보라 색 구절초 꽃 곁을 지날 때

구절초 꽃은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한번 피었다 지는 꽃이야

너도 이렇게 꽃 피어봐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를 지날 때

느티나무는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뿌리를 내리고

그 자리에서 사는 거야

너도 뿌리를 내려봐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밑을 지날 때

구름은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허공을 떠도는 거야

너도 그렇게 정처 없이 떠돌아봐

 

내 평생 산 곁을 지나다녔네

산은 말이 없었네

산은,

지금까지 한마디 말이 없었네

 

 


 

 

김용택 시인 / 봄비

 

 

바람이 붑니다

 

가는 빗줄기들이 옥색실처럼 달려오고

나무들이 춤을 춥니다

 

그대에게

갈까요 말까요

 

내맘은 절반이지만

날아온 가랑비에

내 손은 젖고

내 맘도 벌써 다 젖었답니다

 

 


 

 

김용택 시인 / 사랑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이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이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속의 아픔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참된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이뻐 보이고

소중하게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

당신으로 어어지던 날들과

당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얹은 어느 날

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

우리 둘인 참 좋았습니다

 

이 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

그러나 다 내 조국 산천의 아픈

한 봄입니다

 

행복하시길 빕니다

 

안녕

 

 


 

김용택(金龍澤) 시인.

1948년 전북 임실 출생. 순창농림고등학교를 졸업. 1982년 "21인 신작 시집"에 '섬진강'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섬세한 시어와 서정적인 가락을 바탕으로 농촌의 현실을 노래하였다. 섬진강 곁에 거처를 두고 초등 학교 교사로 재직중인 그는 이제까지 시집 『섬진강』(1985) · 『맑은 날』(1986) · 『누이야 날이 저문다』(1988) · 『꽃산 가는 길』(1988) · 『그리운 꽃편지』(1989) · 『그대, 거침없는 사랑』(1993) · 『강 같은 세월』(1995) · 『그 여자네 집』(1998) 등을 펴낸 바 있다. 김용택은 1986년에 '김수영 문학상', 1997년에 '소월 시문학상'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