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광렬 시인 / 바오밥
열대 아프리카의 나무가 온대의 내 가난한 정원에 뿌릴 내릴까 싶다가
신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진 나무 수명이 오천 년이나 된다는 나무를 심는 일은 명주실 한 타래를 위해 끊어진 누에고치에 새삼 숨을 불어넣는 일과 깨져버린 꿈을 잇기 위해 삼가 눈을 감는 일 문드러져 사라져버린 지문을 다시 새기고 흐릿해진 손금에 새로이 먹을 먹이는 일
무엇보다 뵌 적 없는 조상에게 엄숙히 제를 드리는 일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잠자는 이마에 듣는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오늘 그 바오밥나무 씨앗을 묻기에 이른다
그 씨앗, 찬바람 불고 눈 내리면 동동 얼어붙겠지만 지구의 온난화로 여름이 한 만 년쯤 될, 천 년 그 어느 끝자락 즈음 미이라 내장 속 과일 씨처럼 문득 싹을 틔워 다섯 장 흰 꽃잎 만국기처럼 흔들리고 죽은 쥐 모양의 열매 달랑, 고양이처럼 웃으면
가지보다 더 가지 닮은 나무의 뿌리는 지구별의 한복판을 뚫고 불쑥 반대편 이웃 정원의 나뭇가지로 솟아 남반구 북반구 대척점 사람들 모두 한나무에서 움튼 열매를 나누고 손자의 손자들은 집 한 채 크기 둥치에 대문보다 더 큰 구멍을 내 팔촌, 십이촌 한나무 한가족을 이룰 것이니
지난날, 강 저쪽을 망각해 도강의 꿈을 저버렸던 새 한 마리 뿌리보다 더 뿌리 같은 가지 위에 앉아 그 평화스러운 나눔을 지긋이 바라볼 때
그즈음 이 정원엔 눈이 내려도 좋을 것이다 씨앗을 쥐고 있던 내 손바닥, 화석이 되어도 좋을 것이다
- 구광렬 시집 <<불맛>>, 2009년, 실천문학사
구광렬 시인 / 탈의실
점퍼를 벗다가 소매 하나를 남긴 채 멈춘다 TV 속 연쇄살인범이 모자를 눌러쓰고 마네킹의 목에 칼을 대고 있다 셔츠의 단추를 풀다가 멈춘다 국회에서 난투극이 벌어지고 눈덩이가 벌겋게 된 여성 국회의원이 뛰쳐나온다 러닝셔츠를 벗으려다 멈춘다 농성하던 철거민들이 시체로 실려 나간다 바지를 내리려다 멈춘다 노숙자끼리 잠자리를 놓고 싸우다가 고참이 신참을 죽인다 팬티를 내리려다 멈춘다 여중생들이 집단으로 성매매를 한다 엄지에 구멍 난 양말을 벗으려다 멈춘다 내 차 기름인 경유가 두 배로 뛸 거란다 발가벗은 채 멈춘다 눈밭에서 외투를 껴입은 리포터가 외출을 자제하고, 차바퀴에 체인을 감으란다
- 구광렬 시집 <<불맛>>, 2009년,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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