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 시인 / 삼일포 여자
여기서 사랑을 하다 죽어버리자
둔덕의 무꽃처럼 눈매 서글하고 고봉으로 핀 이팝나무 꽃 무더기만큼 마음 따뜻하여 세월 내내 무릎 잠 재워 줄 것 같은 내 청춘의 삼일포 여자여
베갯머리 한 자락 파도 나무꾼과 선녀의 사랑 이야기 출렁이는데
그해 겨울 부끄러움과 두려움 속 말없이 새운 푸른 밤 기억하는가? 뼈를 가르고 달려오는 함포 소리 에밀레종 소리보다 슬픈 한숨 소리
사랑이여 춥고 메마른 그 날의 입술 곁에 70년 녹슨 우리의 심장을 눕히자 무꽃 밭 팔랑팔랑 춤추는 두 마리 배추흰나비의 추억처럼 눈썹을 부비자
연분홍 치마저고리로 걸어오는 아득한 내 이승의 절망이여 돌아가리라 늙은 소의 볼기처럼 쳐진 너의 젖가슴 곁으로 녹슨 철조망 화석처럼 굳은 너의 주름살 바람에 날리는 무꽃 선한 웃음 곁으로
슬픔과 치욕 죽음의 시간 털어내고 달빛 속 튀어 오르는 보리숭어 떼 그날 못 만든 아기 울음소리 밀려오는 파도 위에 새기리라
곽재구 시인 / 사월의 노래
사월이면 등꽃이 피는 것을 기다리며 첼로 음악을 듣는다
바람은 마음의 골짜기 골짜기를 들쑤시고
구름은 하늘의 큰 꽃잎 하나로 마음의 불을 가만히 덮어주네
노래하는 새여 너의 노래가 끝난 뒤에 내 사랑의 노래를 다시 한번 불러다오
새로 돋은 나뭇잎마다 반짝이는 연둣빛 햇살처럼 찬란하고 서러운 그 노래를 불러다오
시집,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열림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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