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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곽재구 시인 / 삼일포 여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6.

곽재구 시인 / 삼일포 여자

 

 

여기서 사랑을 하다

죽어버리자

 

둔덕의 무꽃처럼

눈매 서글하고

고봉으로 핀 이팝나무

꽃 무더기만큼 마음 따뜻하여

세월 내내 무릎 잠 재워 줄 것 같은

내 청춘의 삼일포 여자여

 

베갯머리 한 자락 파도

나무꾼과 선녀의 사랑 이야기 출렁이는데

 

그해 겨울

부끄러움과 두려움 속

말없이 새운 푸른 밤 기억하는가?

뼈를 가르고 달려오는 함포 소리

에밀레종 소리보다 슬픈 한숨 소리

 

사랑이여

춥고 메마른 그 날의 입술 곁에

70년 녹슨 우리의 심장을 눕히자

무꽃 밭 팔랑팔랑 춤추는

두 마리 배추흰나비의 추억처럼 눈썹을 부비자

 

연분홍 치마저고리로 걸어오는

아득한 내 이승의 절망이여

돌아가리라

늙은 소의 볼기처럼 쳐진 너의 젖가슴 곁으로

녹슨 철조망 화석처럼 굳은 너의 주름살

바람에 날리는 무꽃 선한 웃음 곁으로

 

슬픔과 치욕

죽음의 시간 털어내고

달빛 속 튀어 오르는 보리숭어 떼

그날 못 만든 아기 울음소리

밀려오는 파도 위에 새기리라

 

 


 

 

곽재구 시인 / 사월의 노래

 

 

사월이면

등꽃이  피는  것을  기다리며

첼로  음악을  듣는다

 

바람은

마음의  골짜기

골짜기를  들쑤시고

 

구름은  하늘의

큰  꽃잎  하나로

마음의  불을  가만히  덮어주네

 

노래하는  새여

너의  노래가  끝난  뒤에

내  사랑의  노래를

다시  한번  불러다오

 

새로  돋은  나뭇잎마다

반짝이는  연둣빛  햇살처럼

찬란하고  서러운

그  노래를  불러다오

 

시집,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열림원, 1999

 

 


 

곽재구(郭在九) 시인

1954년 전남 광주 출생. 전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숭실대학교 대학원. 1981년 중앙 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주로 민중의 삶에 대한 애정을 애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썼다. 시집으로는 '사평역에서'(1983), '서울 세노야'(1990),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1999) 등이 있다.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 1996 제9회 '동서문학상'. 1986 계간지 '시와 사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