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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구광렬 시인 / 바오밥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6.

구광렬 시인 / 바오밥

 

 

열대 아프리카의 나무가

온대의 내 가난한 정원에 뿌릴 내릴까 싶다가

 

신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진 나무

수명이 오천 년이나 된다는 나무를 심는 일은

명주실 한 타래를 위해

끊어진 누에고치에 새삼 숨을 불어넣는 일과

깨져버린 꿈을 잇기 위해 삼가 눈을 감는 일

문드러져 사라져버린 지문을 다시 새기고

흐릿해진 손금에 새로이 먹을 먹이는 일

 

무엇보다 뵌 적 없는 조상에게

엄숙히 제를 드리는 일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잠자는 이마에 듣는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오늘 그 바오밥나무 씨앗을 묻기에 이른다

 

그 씨앗,

찬바람 불고 눈 내리면 동동 얼어붙겠지만

지구의 온난화로 여름이 한 만 년쯤 될,

천 년 그 어느 끝자락 즈음

미이라 내장 속 과일 씨처럼 문득 싹을 틔워

다섯 장 흰 꽃잎 만국기처럼 흔들리고

죽은 쥐 모양의 열매 달랑, 고양이처럼 웃으면

 

가지보다 더 가지 닮은 나무의 뿌리는

지구별의 한복판을 뚫고 불쑥

반대편 이웃 정원의 나뭇가지로 솟아

남반구 북반구 대척점 사람들

모두 한나무에서 움튼 열매를 나누고

손자의 손자들은 집 한 채 크기 둥치에

대문보다 더 큰 구멍을 내

팔촌, 십이촌 한나무 한가족을 이룰 것이니

 

지난날, 강 저쪽을 망각해

도강의 꿈을 저버렸던 새 한 마리

뿌리보다 더 뿌리 같은 가지 위에 앉아

그 평화스러운 나눔을 지긋이 바라볼 때

 

그즈음

이 정원엔 눈이 내려도 좋을 것이다

씨앗을 쥐고 있던 내 손바닥, 화석이 되어도 좋을 것이다

 

- 구광렬 시집 <<불맛>>, 2009년, 실천문학사

 

 


 

 

구광렬 시인 / 탈의실

 

 

점퍼를 벗다가 소매 하나를 남긴 채

멈춘다

TV 속 연쇄살인범이 모자를 눌러쓰고

마네킹의 목에 칼을 대고 있다

셔츠의 단추를 풀다가

멈춘다

국회에서 난투극이 벌어지고

눈덩이가 벌겋게 된 여성 국회의원이

뛰쳐나온다

러닝셔츠를 벗으려다

멈춘다

농성하던 철거민들이 시체로 실려 나간다

바지를 내리려다

멈춘다

노숙자끼리 잠자리를 놓고 싸우다가

고참이 신참을 죽인다

팬티를 내리려다

멈춘다

여중생들이 집단으로 성매매를 한다

엄지에 구멍 난 양말을 벗으려다

멈춘다

내 차 기름인 경유가 두 배로 뛸 거란다

발가벗은 채

멈춘다

눈밭에서 외투를 껴입은 리포터가

외출을 자제하고, 차바퀴에 체인을 감으란다

 

- 구광렬 시집 <<불맛>>, 2009년, 실천문학사

 

 


 

구광렬 시인

멕시코국립대학에서 중남미문학을 공부(문학박사)한 뒤, 멕시코 문예지 '마침표(El Punto)' 및 '마른 잉크(La Tinta Seca)'에 시를, 멕시코국립대학교 출판부에서 시집 '텅 빈 거울(El espejo vacío)'을 출판하고부터 중남미작가가 되었음. 국내에서는 오월문학상 수상과 함께 현대문학에 시 '들꽃'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 시작. 현재 울산대학교 인문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경주 동리목월문예창작대, 대구교대 등지에서 문예창작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