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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증식 시인 / 몽당비 한 자루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6.

고증식 시인 / 몽당비 한 자루

 

 

학교 화장실 청소 담당 신만자 여사

학생들 8교시 수업하듯

여덟 개나 되는 화장실 혼자

오십 분 뻘뻘 땀 흘리고

십 분 종소리에 맞춰 숨 돌리는

고3보다 더 고3 같은 우리 민자 씨

삼십 년 부산역 열차 닦다

인공관절 해넣고 잘렸다는 만자 씨

어쩌다 차 한잔에도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세상 사람 다 고마운 만자 씨

훗날 하느님 앞에 가면

평생 지구만 닦다 왔구나, 칭찬 받을

닳고 닳은 몽당비 한 자루

 

- 시집 <얼떨결에>

 

 


 

 

고증식 시인 / 달 때문에

 

 

추석날 밤

고향집 마당에 앉아

오래전의 그 둥근 달 보네

 

달빛동동주 한 잔에

발갛게 물든 아내가

꿈결인 듯 풀어놓는 한마디

 

-지금 같으면

당신이 무슨 짓을 해도

다 용서할 수 있을 거 같아

 

하마터면 울컥

다 털어놓을 뻔했네

 

 -시집 '하루만 더'에서

 

 


 

 

고증식 시인 / 소라게

 

 

 새 집으로 이사하면서 아내와 신경전이 잦아졌다

늘푼수라고는 없는 사람,

내다 버리면 주워 들이고 새 걸로 사자면 그냥 없는 대로 살잔다

인생이 뭐 그리 긴 줄 아느냐고 지지리 궁상이나 떨다 가면 누가 상장 주느냐고

더러는 칼날을 세워 모처럼 부풀어오른 아내의 꽃망울을 무참히 잘라 버렸다

처음 빈주먹 하나로 시작할 땐 부러울 게 없었는데

열서너 평 임대아파트 하나 걸려 천하 재벌들 다 눈 아래로 보였는데

금쪽같은 어린 것들 낳아 기르며

아, 마음 넘치게 갈 줄 알았는데

어느새 불어난 욕심주머니 채울 수 없다

굽은 등판에 덩그렇게 집 한 채 지고

 

 


 

 

고증식 시인 / 가을 운동회

 

 

  만국기 나부끼는 하늘에 하낫, 뚤, 하낫, 뚤, 측백나무 울타리를 타고 넘던 선생님의 마이크 소리 개선문 뒤에 몰려 재재거리던 여린 병아리들 틈으로 사르락 사르락 금실 같은 햇살 속을 걸어 어머니 오신다 쓰윽, 무명 치맛자락 문질러 온 붉디붉은 사과 한 알 나는 어머니 거친 손마디가 너무 부끄러워 줄 속으로 더 깊이 숨어버렸다 한참이나 허공을 떠받들고 있던 손길에 그 날 이후 목구멍에 걸려버린 서러운 사과 한 알

 

 


 

 

고증식 시인 / 물처럼

 

 

  그렇게 가십시다 생의 상처 너무 깊어 진물 흐르면 모르는 듯 한 소식 던져주고 어쩌다 지나는 길 한잔 술에 마음 젖으며 떨리는 그리움 오래오래 묻어둡시다 더는 무슨 모임 같은 것도 만들지 말고 어쩌다 풍문에 욕 한마디 날아들면 아니지 아닐 거야 떨어버리고 어디서 글이라도 한 줄 만나면 종일토록 출렁이면서 이젠 쉬 달아오르지도 맙시다 우리네 걸음이 우리들의 진보, 타고난 게걸음에 더는 마음 무너지지 말고 저만치 잘난 사람들 뒤에서 손톱만큼 기죽을 것도 없이 이형, 우리 그냥 그렇게

 

 


 

고증식 시인

1959년 강원도 횡성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1994년『한민족문학』4집으로 시문단에 나옴. 시집으로 『환한 저녁』,『단절』,『하루만 더』, 시평집 『아직도 처음이다』등이 있음. 밀양문학회장, 한국작가회의 이사 등을 역임.